“전통도 힙(Hip)하게, 차 한 잔과 함께 인생 샷 한 컷 ”전북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 방문희망지 1순위는 단연코 전주 한옥마을로 이곳은 풍남문 일대 약 730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전통 한옥촌이다. 우리나라 근대 주거문화 발달과정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공간으로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박물관, 전시관, 체험관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있어 그야말로 한옥, 한식, 한지, 한복 등의 한(韓)스타일이 집약된 명실공히 대한민국 대표 여행지로 손꼽히고 있다.한옥마을이야 전국에 많이 있지만 이토
금요일 저녁 7시30분.한여름 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전라북도 무주군에는 어김없이‘무지개’가 뜬다.2011년 결성된 무주군의 다국적밴드 ‘레인보우’는 필리핀과 베트남, 태국, 일본 등 한국으로 시집온 결혼이주여성 7명이 모여 만든 무주군 대표 다문화 홍보대사다.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1인 3역을 넘어 밴드까지 소화해내는 수퍼우먼들이 호흡을 맞추며 지내다 보니 어느덧 강산도 변한다는 10주년을 맞은 레인보우.다문화가정 2세와 센터의 구성원까지 아우르는 확장으로 내실을 다져, 이제는 수준급의 음악을 선보이는 산골마을 무주
하나 둘 셋!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하나!베트남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판티투힌(45)의 소원 하나!그녀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인 1990년대 초반, 베트남의 1인당 국민소득은 98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누구누구가 한국에 시집 가 행복하게 잘 살더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요. 당연히 그녀 또래 사이에서는 한국남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게 소망이었지요. 막연한 동경이자 소원은 지난 2004년,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에 이루어집니다.둘!고창 새댁으로 16년, 보석 같이 예쁜 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거센 바람과 폭우에도 가냘픈 줄기에 온 몸을 지탱하며 끝내 아름다움 꽃을 피워낸 그 흔들림. 올해 예순의 미요코 씨를 보는 순간, 흔들리며 피는 꽃이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그 스토리를 들어 본다.일본의 알프스인 해발 3015m의 다타야마산이 있는 도야마현에서 순창으로 시집을 온 호리 미요코 씨(60). 1990년대 초반, 서른 셋 적지 않은 나이였다. 낯선 순창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그는 한 남자의 아내로,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로, 딸 셋을 양육하는 어머니로 바지런하게 살았다.넉넉하지 않
베트남 하노이에서 60Km쯤 떨어진 하이즈엉에서 나고 자란 당티후에(31)씨의 사연이다.오빠 둘, 언니 둘, 여동생 하나. 6남매 중 다섯째인 당티후에는 지난 2012년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전북 완주군으로 시집을 와 완주군민이 되었다.“안녕하세요”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밝은 미소 뒤편에는 감춰진 아픔이 크다. 그 무엇일까?#아픔 1하나뿐인 아들 박주윤(8)군은 장애학교에 다닌다. 돌잔치를 넘겨 20개월쯤 지나서 알았다.아이가 말을 못하고 걸음마가 늦어 찾아간 전북대병원에서 발달장애 진단을 받고 얼마나 흐느껴 울었는
#1여기 시설하우스에 다섯 식구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김제시 공덕면. 대한민국 최고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노란 방울토마토 꽃이 가득 피어난 시설하우스. 그 안에 주렁주렁 맺힌 토마토의 다른 이름은 ‘아름다운 미래’라고 하네요.행복을 찾아 도착한 한국, 네 명의 아이를 홀로 양육하는 킨티엔 씨(33·여)는 슬픔을 잠시 미루고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농사일에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이 넷과 함께 토마토를 수확하는 킨테엔 씨 가족의 모습은 남부럽지 않지만, 이곳 하우스에 함께 해야 할 아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그럼에도
희망!그것은 노력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내로 쟁취하는 것일까요?캄보디아 노동자들의 모습은 피나는 노력으로 일상처럼 비치는가 하면 자신을 질책하는 고통의 연속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 그들도 잘 알고 있지요. 천진난만한 미소는 희망이 현실로 다가오리라는 자신감의 발현입니다.비닐하우스 안에서 카메라 렌즈를 보며 검지와 중지로 ‘V’를 표시하며 환하게 웃는 스물두 살 케우와 친구의 모습에 손은 셔터를 누르고, 마음은 절로 엄지를 치켜 올립니다.머나먼 소망의 땅 캄보디아에서 날아온 그녀들이
군산 앞바다 야미도항 아침 6시.동티모르에서 온 엘리제오와 동료들이숙소근처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30분 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섬마을 선착장에 하나 둘,나타난 8인의 외국인 근로자들은오늘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선착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자칫 방심하면사고로 이어지기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다.어둠이 조금씩 걷히지만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해무가 바다를 뒤덮고 있다.입춘에 경칩까지 지난 3월, 뭍에선 봄바람이 불지만야미도 바다목장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분다.10분만 나와 있어도 온 몸이 꽁꽁 어는한겨울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
짙푸른 바다, 그곳에서 꿈과 희망도 건진다---동티모르---400년 동안 포르투갈령으로 남아 있던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공에 의해 1977년 인도네시아령(領) 동티모르주로 편입된 후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면적은 1만 4609㎢, 우리의 강원도만 한 크기이다.-------------------------------------------------------------------------------------- 푸른 바다에서 건지는 것은 양식 김이 전부가 아니다. 동남아의 빈국 동티모르(East Tim
“신종 코로나19, 또한 지나가겠지요.”중국인 출신의 억척 아줌마 리쓰친 씨(40)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전주 남부시장 코오롱상가 앞 중국 전통식당을 운영하는 그는 한국에 온지 올해로 14년째. 20대 후반의 꽃다운 나이에 중국 하얼빈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큐피드 화살을 쏘았다. 결혼 후 두 아들과 딸을 낳아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다 밖으로 나가 일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부시장 야시장에서 억척스럽게 2년 동안 애플수박 쥬스를 팔아 지금의 식당을 개업했다. 사실, 리쓰친 씨 집안은 식당과 뗄 수 없는 이력이 있다. 바로 위
고향 태국에 사는 가족을 위해서다. 축축한 땅에서만 자랄 수 있는 미나리처럼 위라싹(37세)씨는 올해 들어 가장 차가웠던 영하5도의 날씨에도 찬 물에 몸을 던져야지만 돈을 번다.겨울의 새벽 추위. 흡사 송곳으로 후려 파듯 뼛속까지 시리게 한다. 이불속에 있을 아침 6시에 차디찬 미나리꽝에 몸을 담가야만 위라싹(37) 씨의 꿈은 이루어진다.한국에 온지 어언 5년 6개월째. 태국인 위라싹 씨는 아직도 추위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말한다. 전주시 전미동의 한 미나리농장, 그는 오늘도 이른 새벽에 수도승처럼 초록빛 미나리 수레를 밀며
한 장의 사진이 백 마디의 웅변보다 울림이 더 클 수 있습니다.순간의 한 컷이 문장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사진 한 장으로 고단한 삶의 디테일을 모두 담아내기엔 부족하겠지만 화려한 어휘보다 따뜻한 앵글이 더 뛰어날 수 있습니다.사진 한장한장이 그들에게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일거라 믿습니다.전라일보는 이런 관점에서 ‘포토 스토리’를 야심차게 시작합니다.기사가 주재료이고, 사진은 양념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모험이자 도전입니다.첫 테마는 어느덧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의 생활상입니다.다문화는 글로벌 시대의 선
9명의 생계 책임 진 껑으언의 미소, “일 더 하고 시퍼요”혹시 지금 힘드신가요?그럼 이 사람 이야기를 들려 줄께요.그녀의 어깨 위에는 9명의 생계가 달려 있어요.76세의 아버지와 73세의 어머니,언니 셋을 포함한 형제자매 다섯 명,그리고 아들 둘….전주시 전미동의 한 미나리농장에서 억척스럽게 일하는태국에서 온 껑으언 싱두엉 씨(35)의가족사항입니다.그는 부모님 봉양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지난 2017년 6월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이후 전주의 미나리 농장에서격무의 일상을 반복해 왔습니다.아침 6시에 출근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