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내 - 1894년 무장 기포와 1919년 무장 3.1 만세운동고부 봉기 후 전봉준 장군은 무장에 와서 손화중을 설득한다. 이에 강경중과 청송역에서 3천명이 봉기한다. 3월 16일부터 죽창을 무기로 사용한다. 구적산 아홉 골짜기 시냇물이 모여 석교 법성포로 가는 길목 넓은 냇가(구수내)에 버드나무 우람하고 흰 모래사장은 수천명이 모일수 있다. 농민군이 진을 짜고 훈련하는 석교에는 백산처럼 세금으로 거둔 쌀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군량미와 물자 조달에 유리하다. 교통의 요지 정읍, 고부, 전주, 영광, 법성포, 나주, 장성으로 이
지난 6월 호남중학교에서 있었던 동학혁명(東學革命)에 대한 강의는 나의 동문(청학동書堂) 김봉곤 교수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금년 학기 초 수요공부방에서 함께 동학에 관련된 공부를 하자는 제의에 바로 스터디를 하게 되었다. 스터디 모임에서 매주 2시간 이상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의 활동상황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또한 시민강좌의 초청 강사이신 이남희 선생과 김용우 선생, 이명권 교수의 강연을 들으면서 점점 관심에서 배우는 자세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동학혁명 유적지 답사를 하면서 당시 농민들의 처절했던 절
김주용(독립기념관)1. 머리말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은 세계인류가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의 지역적 광범위성은 한국독립운동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만큼 독립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적지(유적지)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후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경술국치 이후 한인 이주는 정치적인 망명과 생활 이주가 혼합된 형태로 진행됐다.서북간도 한인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됐다. 한인사회의 형성과정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만주의
일제 강점기 특히 1920, 30년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식량 원료공급지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는 더욱 강화된다. 조선인은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또 그 가운데 8할이 소작농민이었다. 조선의 소작농민이 처한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 가운데 농민운동은 반일 민족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실질적인 소작료는 최소 39%에서 최고 90%에 달하는 고율이었으며, 그 외에 비료대, 수세, 운반비, 지세 등을 소작인이 부담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일부 농민은 일본 만주 등지로 이주하게 되고, 혹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 후 정읍을 찾아 "정읍에 빚진 게 많다"고 했다. 정읍 보천교는 독립운동자금의 산실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정읍의 김홍규 집에서 열었을 때 김구와 이승만이 모두 참여했을 정도다.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이자 풍수설로 인한 종교적 확장, 선구적 사상가들에 의한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영원면에는 아나키스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이, 대흥리에는 보천교 중앙본부가 있다. 파리장서 기념비에는 정읍 소성면 출신 김양수 독립운동가의 기록이 있고, 정읍시 고부면에
1. 민족대표 33인 박준승 선생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박준승(朴準承 1865~1927) 선생의 묘가 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의 충렬사(忠烈祠) 뒤편,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의 비탈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묘 앞에는 민족대표 33인 이갑성이 찬(撰)한 ‘자암 박준승선생묘(?菴 朴準承先生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서있다. 박준승 선생의 묘는 원래 정읍시 북면 마정리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1965년 6월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박준승은 전북 임실군 청웅면 출신으로 김영원의 제자이다. 1890년 동학 입교, 1897년 동학 접주를 지냈고
김민영(군산대) 일제강점기 전북지역은 상대적으로 공업발전이 지체되어 쌀과 면화를 주 원료로 하는 식료품과 방직공업 등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만큼 금속, 기계기구 등의 중공업은 매우 더딘 기형적 구조를 가졌었다. 당시 전반적으로 일본에 종속된 기형적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농업을 주종으로 했던 전북지방에서는 그 파행적 성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후 1920년대에 들어 상대적인 공업의 진전과 함께 노동운동의 대중적 진출 역시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의 성장은 일정하게 운동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고 지도
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금구지역의 대접주였다. 그는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원평집회의 주역이었으며 1894년 무장기포, 백산대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 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그의 활동 지역인 금구 원평은 동학농민전쟁이 잉태됐던 교조신원운동의 집회지이자 1차 봉기의 중심지이며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돼 전라우도를 총괄하던 곳이다. 또한 2차 봉기 후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총력을 다해 싸웠던 원평전투[구미란 전투]의 현장으로 이곳에서 영호대접주인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큰 세력을 가진 동학교단의 대접주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지역봉기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된 무장기포의 주역이었으며 동학농민혁명 진행 과정에서 정읍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촌 전투 승리 등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861년(철종 12)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부친 손호열(孫浩烈)과 모친 평강 채씨(蔡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정식(正植)이고, 자는 화중(化中, 華仲)이며, 호는 정읍의 옛 이름인 초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전라일보가 주최하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후원한 ‘전북지역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강좌는 지난 4월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의 ‘전북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사적지 분포 현황’을 시작으로 매월 2차례씩 총 10차례 진행됐다.앞으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전북인의 국외독립운동’ ‘전북지역 사회활동과 사적지 보고’ ‘전북지역 농민운동과 사적지’ 등 11월까지 6차례를 남겨뒀다.1년 남짓 전라일보의 사업은 전북인의 동학농민활동과 독립운동에 대해 알림으로써 도민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