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용(독립기념관)

1. 머리말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은 세계인류가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의 지역적 광범위성은 한국독립운동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만큼 독립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적지(유적지)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도 후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경술국치 이후 한인 이주는 정치적인 망명과 생활 이주가 혼합된 형태로 진행됐다.
서북간도 한인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됐다. 한인사회의 형성과정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만주의 경우 일제의 침략 첨병인 영사관 영사 경찰 및 중국 지방 정권의 하수인들에 의한 탄압과 감시는 그 도를 넘어 생존권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한인사회를 이용하여 한인들로 하여금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정책도 서슴지 않고 내놓았다. 일제가 이러한 정책을 실행한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이 독립운동의 메카로 주목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주지역에는 체계적인 항일독립운동 기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간도지역의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및 북간도지역의 태평 동림학교-나자구사관학교 등이 설립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30년대 일제가 ‘만주국’을 설립한 이후 폭압적인 치안숙정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는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열정과 한인사회의 지원이 결합됐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현지사회를 이해하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2. 이주
 
 한인의 만주 이주에 대해 일부 일본 학자는 조선 내의 발달된 자본주의에 대한 부적응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으로 이주 또는 이민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동경과 모국에 대한 복잡한 심정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만주는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군벌의 할거, 열강들의 사냥터 등 만주지역은 한인에게는 새로운 이주지였지만, 어쩌면 더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중국 동북지방(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원형은 불과 1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인 이주 초기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됐으나, 1910년 한일병합을 계기로 정치적인 망명 등이 더해져서 그 수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초미의 관심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는 만주는 20세기 초 러시아?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파워게임의 무대였다. 이렇게 열강들이 강렬하게 추파를 던진 만주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비롯한 드넓은 경작지와 산림자원이 산재해 있었지만 19세기까지 봉금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마치 무주공산과 같았다.
만주로의 한인 이주는 중국 관내의 漢人 이주와 맞물려 이곳의 지역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서 이주한인의 물결이 거세질수록 중국 중앙정부와 지방정권은 한인을 어떻게 통제하고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1910년대 한인이주 물결은 만주지역 구조를 점차 바꾸기 시작했다. 이는 거주지의 지역적 특성뿐만 아니라 경제상황 역시 변화시켰다. 이른바 서간도와 북간도로 대표되는 한인 거주지는 1920년대를 지나면서 북만주까지 빠르게 확대됐으며 1930년대 만주국 성립 이후 일제에 의하여 ‘안전농촌’?‘집단부락’창정 계획이 실행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거주지가 계속 탄생됐다.
 
3. 한인커뮤니티 구축

  한인의 만주이주는 크게 자율기, 방임기, 통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860년대 함경도지방의 큰 가뭄으로 만주이주는 본격화되었다. 여러 해 동안 기근과 흉작에 허덕이던 함경도 농민들은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같은 방식으로 평안도 지역 한인들은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에 정착했다. 한인들이 중국인 보다 비교우위에 있었던 것은 수전농법을 실시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 만주지역에 벼농사는 한인의 손에 의해서 시작됐다.
 청국 정부의 차별 정책에도 한인 이주 물결은 계속됐다. 1903년 7월 한반도의 북부와 간도지방을 탐방한 러시아 관리 코자코프(Kozakov)의 증언에 의하면 화룡과 용정에는 대부분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한인들이 미개척지를 개간한 선구자였다고 말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까지 만주지역 한인 이주 수는 약 20만 명 이상을 보이고 있다.
 만주는 열강들에게는 마지막 자원의 보고이자 거대한 ‘먹잇감’이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부설, 일본의 만주침략, 청국과의 ‘간도협약’ 등이 증거이다.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 후 정치적인 망명도 눈에 띠게 증가했다. 일제의 토지수탈이 가속화되면서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은 만주로의 이주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부터는 남부지방의 주민들은 북간도에서 훨씬 먼 지방으로 이주했다. 한인이주의 증가는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가 확충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1931년 만주사변(9.18)으로 그 이듬해 만주국을 건립한 일제는 한인 이주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930년대초 약 100만명의 한인 이주자는 1945년 해방 당시 220만명 정도였다. 이들 이주자는 대부분 흑룡강성 남부와 북부에 집중됐으며, 현재도 이들의 삶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4. 독립운동의 과거

만주지역은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독립운동의 추동력은 한인사회의 토대위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됐다. 서북간도 지역에 이주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은 신흥무관학교로 상징되는 국외독립운동기지의 건설로 나타났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만주로의 한인이주는 더욱 가속화되고, 서간도(남만), 북간도(동만)과 북만에 시차를 두면서 한인 이주사회가 형성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서간도, 북간도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한인들이 몰려들어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를 이루게 됐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대륙침략과 한반도 침략의 거두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척살했으며, 1920년 10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청산리 대첩 역시 북간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만주지역의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선도하고 그 인적자원을 끊임없이 배출해 낼 수 있었던 신흥무관학교의 기상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1910년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독립전쟁론으로 대표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백두산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 길림성에서는 유일한 자치주로서 식민지기 이주한인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다. 한인들은 이곳에 서전서숙을 비롯한 수많은 민족학교를 설립해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한인자치기구를 설립해 이주한인의 정착을 돕는 데 진력했다.
1919년 연변지역의 3.13항일시위운동은 1910년대 한인사회가 축적했던 항일열기를 한꺼번에 분출시킨 일대 사건이었으며, 1920년 10월 21일부터 5일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청산리 대첩은 제국주의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었다.
흑룡강성 북부 지역인 치치하얼과 가목사에서도 한국독립운동의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치치하얼의 경우 지역적 특성상 주변에 펼쳐져 있는 평원을 이용한 수전농법이 가능하였으며, 한인 이주 역시 이에 따라 진행되었다.
 1919년 봄 김필순은 이광범과 함께 현재 용강현 지방에 이상촌을 건설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혈성단의 경우 북만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에 편입됐다.
내몽고지역의 한인 이주는 중국 동북지역 보다 늦게 진행됐다. 1920년대 초 안창호는 내몽고 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계획했다.
내몽고 지역 빠오터우 120km 서쪽으로 위치한 곳에 배달농장과 배달소학교를 세워 항일운동과 민족교육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면서 빠오터우 지역에서도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취원창은 현재 흑룡강성 아성구 거원진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취원창의 대표적 인물은 석주 이상룡이다. 그는 동생 이봉희와 조카 이광민, 당숙인 이승화가 같은 묘지에 묻혔다가 1990년 9월 13일 국가보훈처의 노력으로 국내에 봉환됐으며,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치됐다.
밀산지역은 흑룡강성 가운데 한국독립운동 기지로서 일찍부터 주목받은 곳이다. 홍범도 역시 밀산지역에서 군인들과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5. 전라북도인의 해외독립운동
1) 중국으로 간 독립운동가들- 정화암과 백정기 의사
 정화암은 전북 김제출신으로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등과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33년 상해에서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을 척살하는 등 친일배와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활동도 전개했다.
 정화암과 함께 평생 독립운동을 전개한 정읍 출신의 백정기 의사는 이른바 ‘육삼정의거’로 일제에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는 1932년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윤봉길 의사가 했다고 하면서 진정한 독립운동가의 길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었다. 백정기 의사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아이스크림 영업원으로도 일했다. 자신의 생존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던 백정기 의사는 미래 세대들이 꼭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2) 한국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나용균은 국민대표회의 등 그 활동상이 매우 광범위했다. 나용균 선생은 환국 후에도 이청천 등과 함께 독립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애쓰셨다. 부안군 출신 고제신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5. 결론

 한국독립운동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보듬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다.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밝은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만주지역에는 아직까지도 ‘조선족’이라는 중국 공민으로 살아가는 ‘한민족’들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들의 현재성은 모국 한국에게는 과거와 미래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서 영토는 전쟁 또는 국제법에 의한 방법으로만 획득할 수 있다. 극단적인 물리력이 현대사회에 얼마나 위험한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잃어버렸지만 그곳에서 아직까지도 우리의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 이들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협력이 미래에 대한 확실한 담보물은 아닐까.
 현재 만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는 우리의 보이지 않은 중요한 자산이자 한중 양국이 서로 공존하는 데 필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사적지는 우리 선혈들의 미래에 대한 과거의 외침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거울이라는 점을 더욱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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