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큰 세력을 가진 동학교단의 대접주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지역봉기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봉기로 확대된 무장기포의 주역이었으며 동학농민혁명 진행 과정에서 정읍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촌 전투 승리 등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861년(철종 12)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부친 손호열(孫浩烈)과 모친 평강 채씨(蔡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정식(正植)이고, 자는 화중(化中, 華仲)이며, 호는 정읍의 옛 이름인 초산(楚山)이다. 본관은 밀양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한 손홍록의 후예이다.
   손화중은 1880년 초 지리산에서 동학에 심취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부안에서 시작된 포교 활동은 정읍 농소리(현 정읍시 농소동), 입암면 신면리, 음성리 본가를 거쳐 무장현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는데 본격적으로 무장읍내 김모(金某)의 집을 포접소로 이후 무장면 덕림리 양실마을(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로 자리를 옮겼다. 동음치면 두암리 사기동에도 근거를 두고 활동을 하였다.
  고창지역은 손화중이 동학의 접주로서 농민들의 신망을 얻은 근거지이자 이를 기반으로 무장에서의 봉기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손화중이 동학농민혁명 과정 중 고창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손화중이 고창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배층의 탐학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원과 맞물려 사람이 곧 하늘을 뜻하는 인내천(人乃天), '하늘의 마음이 곧 민중의 마음을 뜻하는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동학사상을 전개함으로써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여기에 ‘선운사마애불비기탈취사건’은 고통받는 민중들을 구원할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교세를 확장하여 동학 교단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그는 1893년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에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삼례집회, 금구집회, 보은집회 등 교조신원운동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동학교도들은 대중집회에 참여하며 군중의 위력과 바램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행보로 이어진다. 그것은 삼례집회를 마친 후 무장군수에게 빼앗긴 지목전 천 냥을 되돌려 받는 행위로 이를 주도한 손화중,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김덕명 등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을 이끄는 중심세력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1894년 1월 고부봉기 이후 무장에 들어온 전봉준은 손화중을 만나 재봉기를 주장하나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동의하지 않던 그는 전봉준의 끈질긴 설득으로 농민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전라도 최대의 세력을 가진 무장지역 손화중포의 참여는 이제 고을 단위의 고부봉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손화중,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김덕명 등의 지도자들이 무장(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 모여 봉건정부의 수탈에 맞서 항의와 저항할 것을 천명한다. 이들은 ‘보국안민’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밝히고 무엇보다 이때부터 동학교도과 일반 농민과의 결합이라는 점, 전국적인 무장봉기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무장에서의 기포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무장기포’ 이후 부안 백산대회에서 손화중은 총관령을 맡아 농민군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때 약 8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였는데, 절반이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이었다고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손화중포의 농민군은 고창두령 오하영?오시영?임형노?임천서 등의 영솔 하에 1,500명, 무장두령 송경찬?강경중 등의 영솔 하에 1,300명, 흥덕두령 고영숙 영솔 하에 700명, 정읍두령 영솔하에 1,200명 등 모두 4,700명 등이었다.
  동학농민군은 4월 2일 부안 관아를 점령하고 4월 7일 전주에서 온 관군과 보부상군 수천 병력과 맞서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9일에는 무장으로 들어갔다. 이때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으며 무장관아에서 10리쯤 떨어진 호산봉에 설진하여 3일을 더 머물렀다. 이후 영광을 점령하고 4월 2일 장성 황룡촌에 진을 친 뒤 23일 경군과 최초의 전투를 벌여 승리한 후 홍계훈이 이끄는 군대와도 맞서 승리함으로써 4월 27일에는 무장봉기 이후 5주 만에 전주성을 무혈점령하게 된다. 이 승리는 손화중포를 중심세력으로 하는 전라 각 군현의 농민군들이 거둔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다. 손화중은 일반 농민출신 뿐만 아니라 천민출신의 특수부대를 만들어 호위군으로 삼기도 하였는데 민첩하고 용맹스러워 가장 강한 세력으로 평가받기로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손화중은 삼례에 가지 않고 광주에서 동학농민군도회를 열고 통문을 돌려 인근 동학농민군을 광주에 집결시켜 전봉준에 호응하였다. 그것은 주변 각 군현의 동학농민군이 집결지로 빠져나가면 빈틈을 타 나주의 민보군이 활동 영역을 넓혀나갈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에 있던 손화중은 흥덕, 고부, 무장, 정읍, 고창 등지에서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동학농민군과 함께 나주 동쪽 20리 지점인 침산과 송정리 옆에 있는 선암, 북쪽인 용진산 일대에 진출하여 나주의 민보군과 전투를 하였으나 패하였다. 결국, 관군·일본군·민보군의 연합세력에 의해 농민군이 각처에서 패배하게 되고 재기의 어려움을 안 그는 11월 27일 광주 읍내로 들어와 관아와 민가에 나누어 4일간 머무르다가 1894년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한다.
  손화중의 동학농민군이 나주에서 패배하고 흩어진 뒤, 모리오 미사이치(森尾ミサ)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군과 경군은 정읍과 고부를 거쳐 흥덕, 고창, 무장으로 들어와 12월 1일 흥덕, 2일 고창, 3일부터 5일까지 무장에 머물면서 흩어진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였다. 무장에 3일이나 머물러 동학농민군 색출작업을 한 것은 바로 손화중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1895년 12월 11일 고창 부안면 수강산 산당 이씨 재실에서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손화중은 관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실지기에게 그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는 권유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손화중 일가는 혈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살아 있는 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동생 익중과 족질 손여옥은 12월 25일 정읍에서 관군에게 처형당하였으며 족질 손순경, 손무경, 처남 유용수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 밖에 손덕로, 손춘익, 손치경, 손치수 등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의 집은 관군에 의하여 불살라졌으며 부인 유씨는 네 살 된 셋째 아들 응수와 한 살 된 딸을 데리고 전북 옥구로 도망가 김씨로 성을 바꾸고 3년 동안 숨어 지내다 돌아왔다. 당시 농민군 진압의 선봉장이었던 이규태는 손화중을 전봉준·김개남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진 ‘거괴’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고창 무장은 손화중이 동학접주로서 농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은 곳이자 활동무대였으며 체포된 곳 역시 이곳이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은 고부봉기를 전라도 각 고을이 연합한 반정부 봉기로 승화시킨 출발점이다. 무장기포 이후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손화중은 항상 호남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정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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