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 후 정읍을 찾아 "정읍에 빚진 게 많다"고 했다. 정읍 보천교는 독립운동자금의 산실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정읍의 김홍규 집에서 열었을 때 김구와 이승만이 모두 참여했을 정도다.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이자 풍수설로 인한 종교적 확장, 선구적 사상가들에 의한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영원면에는 아나키스트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이, 대흥리에는 보천교 중앙본부가 있다. 파리장서 기념비에는 정읍 소성면 출신 김양수 독립운동가의 기록이 있고, 정읍시 고부면에는 중국에서 광복단을 조직했던 고평 선생 집터가 존재한다.

5.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관

아나키스트 구파 백정기 의사는 1896년 부안군 동진면 출신으로 1907년 영원면으로 이사 와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백정기는 1921년 유길명 공사 살해의거 미수로 체포된 후 감찰의 심문 조서에서 “1921년 일본으로 도항하여 노동에 종사하는 한편, 사회주의 연구에 몰두하다가 사회주의자 이헌, 마명기 외 2~3인의 사회주의자들과 동거, 노동에 종사하고 대정 12년 8월 26일 도쿄를 출발하여 귀향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마명기는 정읍 태인면 강삼리 홍천마을 출신의 마명 정우홍으로 여겨진다. 마명 정우홍은 사회주의자로 관동대지진 때 체포되어 감옥에 있으면서 들은 내용을 훗날 동아일보에 ‘진재전후(震災前後)’라는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연재.)
1923년에는 정읍출신 박승규 일행과 일왕 살해를 목적으로 사전 답사 차 도쿄에 갔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행들은 9월 5일 귀국하고 백정기만 일본에 남아 있다가 그해 말에 귀국하였다.
백정기는 1920년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1930년 북만주로 가서 활동하다가 1933년 상하이 홍커우 육삼정 의거를 준비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고 검거되어 일본 장기(長埼)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4년 순국하였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삼의사 중 한 분으로 1946년 유해가 송환되어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56년에 향리인 영원면 은선리에 백정기 의사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서거 70주년을 맞아 2004년 6월 개관한 백정기 의사 기념관은 총 부지면적 20,850㎡으로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 구파 기념관,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6. 독립운동자금의 산실, 보천교

보천교 중앙본부는 입암면 접지리 일명 대흥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교당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남아 있다. 목조 한옥인 교당 총정원은 정면 6간 ? 측면 2간이며, 우측 1간은 마루다. 교당 내 어간에는 ‘호천금궐(昊天金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1922년에 설립된 중앙본부를 ‘호천금궐’ 또는 ‘구성전’이라 부른다. 구성전 바로 옆에 ‘신성전’이 1925년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중앙본소 내의 십일전(十一殿)은 1929년 3월, 착공한지 4년 2개월 만에 준공되었다. 십일전 주변으로는 45동의 건물, 10여 동의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936년 차월곡 사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어 전매되거나 화목으로 사용되었다.
차월곡은 증산교단의 최초교단인 태을교의 창립자 고판례와 이종남매간이며 그 최초교단이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개창되었기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 후 월곡이 독자적 교단운영을 위한 교권 장악에 나서자 증산 생존 시의 친자종도들이 그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제각기 이탈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세우기 시작했다.
보천교의 폭발적 교세확장은 정읍지역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라는 역사적 배경, 정감록 신앙과 정읍지역의 풍수설, 차경석의 종통 전수 등 민중적 성격, 직접적으로는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독립의 상실감에다 차경석이 천자를 꿈꾸며 독립국을 이룬다는 민족적 염원이 결합된 것이다.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보천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다. 일제는 치성금 등으로 모인 보천교 교금의 독립운동자금 유입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1년 김홍규의 독립군자금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보천교 간부비밀회의 음모를 발각하고 간부 김홍규 등을 체포하는 동시에 그의 자택을 수색하여 다수의 불온문서와 함께 10만 7,550원이 담긴 항아리를 압수하였다. 이는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할 군자금이었다. 김홍규의 독립자금사건은 1920년대 전반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경향성과 분리할 수 없다.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1921년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하려던 김규식 등에게 참가여비 1만원 지원, 1921년 독립운동가 임규에게 5만원의 자금지원,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 참석, 김좌진 장군의 2만원 군자금 지원, 1920년 조만식의 보천교 본부 잠입과 물산장려운동, 1925년 이춘산 등 정의부의 보천교 독립자금 확보잠입 등은 1920~1925년 무렵 보천교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정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정읍의 김홍규 집에서 열었는데, 김구와 이승만이 모두 참석했다고 한다. 탄허 스님(김홍규의 아들)의 아우인 김인허의 회고에 의하면 해방 이후 이승만이 인편으로 세 차례나 김홍규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김홍규가 거절했다고 한다.(『미래를 향한 100년, 탄허』, 조계종출판사, 2013)
한편 임시정부 요인으로 보천교에 파견되었던 이중성은 증산사상에 매료되어 천지개벽경을 저술하였고, 이천자로 불렸다. 그에게도 이승만이 정치 입문을 권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중성에게 한학을 배운 이가 김홍규의 아들인 탄허 스님으로 탄허는 주역에 밝았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 후 정읍을 찾아 “정읍에 빚진 게 많다”고 했다. 이는 보천교를 통한 독립자금 제공이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보천교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안고 모여든 탄갈자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라는 점에서 이는 폭넓게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 독립을 위해 가문과 자신을 희생한 애국지사들 다음으로 민족종교운동에 참여하여 인적, 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한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7. 파리장서 기념비와 김양수

김양수(金陽洙 1849~1930)는 구(舊)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유재(柳齋)이다. 전북 정읍의 소성면 애당리에서 출생하였다. 항일의병을 모집하고 대한독립의군부 참모관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거를 결의하자 고석진·고제만·고예진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구입에 나섰다.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이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자 의분에 차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1914년 7월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 참모관에 임명되어 1915년 4월까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파리장서사건(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사건) 때 탄원서에 서명한 137명 중 한 명이다. 이 일이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왜경들의 사찰대상이 되자 순창·부안·변산 등지로 숨어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전달하였다. 정부는 2001년 8월 15일 김양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8. 더 하는 이야기
  - 대종교인으로 중국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고평 장군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는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로 고평 선생의 집터가 소개되고 있다. 집터 주소는 정읍시 고부면 신흥리 639이다. 신흥리는 고부 관청리에서 눌제의 제방으로 알려진 옛길 서쪽 끝에 있다. 집터는 공교롭게도 부안군 줄포면 율지마을과 정읍시 고부면 신흥마을의 경계에 접하여 있다. 집터 동편에 승훈재(升訓齋)라는 재실이 있고, 골목길 건너편 야산에 장흥고씨 묘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평 선생 집안이 고부 신흥리에 연고를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평 선생은 1886년 4월 8일 고부 태생으로 29세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시 서울에 있다가 납북된 뒤로 그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의 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2년 서울 보광중학교(普光中學校)를 졸업하고, 경성관립법관양성소(京城官立法官養成所)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905년 4월에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檢事)에 임명되었다. 1911년 7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한 후 남도(南道)·동도본사(東道本司) 등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919년 2월 18일에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하장리(下場里)의 박동원(朴東轅, 延吉道尹公署外交科員) 집에서 구춘선(具春先)·김영학(金永學)·유예균(劉禮均)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간도지방의 모든 교회와 단체는 독립선언서가 발표 되는 대로 독립만세를 절규하기로 결의함으로써 같은 해 용정(龍井)에서 3·13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본부 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 등으로 배치될 때 중부 의군부(中部義軍府) 참모장(參謀長)으로 임명되어, 실제 중심세력으로 5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청산리대첩을 거두고 난 다음 밀산(密山)을 경유, 노령(露領)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함께 러시아로 들어갔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나자 원래의 활동 근거지인 연길로 되돌아와 의군부 재기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5월에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總司令)에 김규식(金奎植)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에 피임되어 병력이 4백여명에 이르렀다. 군사훈련과 조직을 강화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둔전제(屯田制)를 택하는 한편,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오는 등 군세를 확충하였으나 실제 항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뒤 1928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였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
1948년 정부수립 후 제헌의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소속 특별재판부의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나자 고평은 서울에 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쪽으로 끌려간 이후로 그에 대한 소식은 끊어졌다. 고평의 생질인 최기환이 1980년대에 외숙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서둘러 1992년에 서훈이 이루어졌다. 고평은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지만 납북인사라는 점,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부의 재판관으로 특임되었다가 반민특위가 좌절되고, 친일청산 대신 친일파들의 득세가 이어지는 등 뒤집힌 역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최근 봉오동 전투가 나왔는데 1920년 5월 7일 홍범도, 서일, 김좌진, 고평, 최명록(일명 최진동), 이영근 등은 봉오동에서 항일무장독립군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홍범도, 최명록, 안무 세 장군이 영도하는 연합독립군을 형성했고 이들은 주력부대를 봉오동에 집결하였다.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이 기록으로 보아 고평 장군은 봉오동 전투에 지휘관으로 참여한 것이 분명하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