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특히 1920, 30년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식량 원료공급지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반봉건적 지주소작관계는 더욱 강화된다. 조선인은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또 그 가운데 8할이 소작농민이었다. 조선의 소작농민이 처한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 가운데 농민운동은 반일 민족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실질적인 소작료는 최소 39%에서 최고 90%에 달하는 고율이었으며, 그 외에 비료대, 수세, 운반비, 지세 등을 소작인이 부담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일부 농민은 일본 만주 등지로 이주하게 되고, 혹은 도시로 들어가 토막민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악덕지주들에 항쟁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항쟁은 지주에 대한 소작쟁의라는 형식으로 표출되게 된다. 따라서 일제하 농민운동은 지주, 특히 일인지주에 대한 소작쟁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농민들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주적 수탈과정에 항쟁하면서 농민의식과 민족의식의 성장을 보았고, 특히 3.1운동 등을 거치며 조직적 기반을 갖추기에 이른다. 이후 1920년대에는 소작인 단체를 결성하고 소작쟁의가 일반화되어간다. 농민에게 있어 소작쟁의는 농민의 생존권을 찾으려는 항쟁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일인 지주에 대해 표출되어졌을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항일운동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성격을 동반하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소작농민들은 자신의 조직을 갖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선 소작인조합의 결성과 농민문제 선언 등을 통해 농민의 단결과 조직화를 강조했던 노동공제회는 초기 농민을 조직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전국적으로 1921년 3개 밖에 없었던 농민관련 단체는 1922년에 23개, 1923년에는 107개로 급증하였고, 1925년에는 126개로 증가하였다. 이들 농민조직의 중심은 소작인조합이었고, 당시 농민운동은 이 조직에 의해 전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시기, 곡창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전북지방에는 옥구의 농민조합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소작인단체가 집중적으로 조직되고 있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는 운동의 연대성과 통일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확대되면서, 각 지방 및 전국차원에서 노동, 농민운동의 연합조직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특히 1924년에 독립하여 농장을 설치했던 니가타현 출신의 농장주들은 고향 일인 지주들의 자본을 도입하여 주식회사 형태의 이엽사(二葉社) 농장을 설치하고 전주에 그 본점을 두었다. 이는 이미 1911년에 가와사키(川崎藤太郞)가 니가타현 출신 농장주들의 공동경영농장으로 전주군 삼례에 설치했던 이엽사(二葉社) 농장을 모체로 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사실은 이 농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식 추구에만 급급한 나머지 유독 전제적인 소작경영방식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1920년대 20여개에 이르는 군옥지역의 일본인농장 가운데 특히 이엽사 농장에서 옥구소작쟁의와 같은 장기에 걸친 그리고 대규모에 이르는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것은 그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일본인 지주들의 종합공동농장인 이엽사 농장이 소작료 75%를 현물 납입할 것을 강요하고 하향조정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자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운동과 함께 일경에 잡혀 간 농조지부장 장태성을 위해 임피역전주재소와 서수주재소를 습격했으며 다음날 새벽 일본경찰이 서수농조간부와 소작인대표를 압송하자 이에 항의해 소작인 500여 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와 관련해 총 80명이 군산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취조를 받았으며 이중 34명이 구금자 탈취, 소란죄 등으로 기소돼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대구 복심원(현재의 고등법원) 판결(1928년 9월) 때까지 항쟁은 계속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927년 11월 28일부터 1928년 3월 1일에 이르는 기간 주요 일간지 기사자료가 있으며, 1928년 5월의 대구복심법원 형사부 판결문 등도 중요한 자료이다.

  옥구소작쟁의와 관련해서는 지역에서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매년 기념식을 갖고 있으며, 2019년에도 11월에 제92회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34명의 피해 관계자 가운데 26명은 아래와 같이 이미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고, 8명은 아직 받지 못한 상태이다.

  최봉엽(건국포장, 1993), 한기석(건국포장, 2002), 오승철(대통령표창, 2002), 문일만(대통령표창, 2002), 이기열(건국포장, 2003), 이성순(건국포장, 2003), 김재풍(대통령표창, 2003), 이용덕(대통령표창, 2003), 오요섭(건국포장, 2003), 이정춘(대통령표창, 2003), 이성춘(대통령표창, 2003), 이진섭(건국포장, 2003), 오남용(대통령표창, 2003), 이광순(대통령표창, 2003), 김기술(건국포장, 2004), 이효남(대통령표창, 2004), 이휴춘(대통령표창, 2004), 장태성(건국포장, 2008), 김준철(대통령표창, 2011), 최은엽(대통령표창, 2019), 정영운(건국포장, 2019), 복만길·서가마·윤경문·이용선·이원섭(대통령표창, 2019)

  따라서 일제 강점기 전북 일원의 일인농장에 대한 전수조사는 물론, 농민들의 생활 상태와 당시 농민운동 뿐 아니라 기타 사회운동 특히 노동운동 등과의 관련성 문제 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다른 지역의 경우, 예컨대 제주항일기념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소안항일운동기념관 등이 이미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경남 진주의 경우에도 항일운동 기념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우리 지역에서도 가칭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한 준비와 함께 옥구소작쟁의와 관련된 조사연구와 역사문화 콘텐츠의 발굴, 향토사 교재 발간 및 탐방 프로그램 연계 등 다양한 활용방안의 강구 등도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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