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대표 33인 박준승 선생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박준승(朴準承 1865~1927) 선생의 묘가 정읍시 수성동 충무공원의 충렬사(忠烈祠) 뒤편, 충혼탑으로 올라가는 길의 비탈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묘 앞에는 민족대표 33인 이갑성이 찬(撰)한 ‘자암 박준승선생묘(?菴 朴準承先生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서있다. 박준승 선생의 묘는 원래 정읍시 북면 마정리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1965년 6월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박준승은 전북 임실군 청웅면 출신으로 김영원의 제자이다. 1890년 동학 입교, 1897년 동학 접주를 지냈고, 1915년 교직 수행을 위래 정읍 산외면 정량리 안계마을로 이주, 1916년 전라도 천도교 최고 지도자인 전라도 도사에 임명,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였다. 1926년에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에 추대되고, 1927년 3월 23일 산외면 자택에서 별세. 장례는 천도교장으로 치러졌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에 산외면 산외초등학교 동쪽에 박준승 기념관이 세워졌다.

2-1. 태인 3·1운동 기념탑

?태인 3?1운동 기념탑 : 전북 정읍의 태인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탑이다. 태인면 태성리 1번지 성황산(125m) 자락에 있다. 1984년 주민들의 성금과 군비 보조금으로 세웠으며, 기념탑이 노후되자 2003년 12월 국비와 시비 등 총 6,800만 원을 투입하여 정비하고, 약 25㎡ 규모의 위패봉안소를 건립하였다. 위패봉안소에는 애국선열 25위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1919년 3월 5일 송수연·김현곤?송한용 등 태인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태인면 태흥리 오리마을 고목 밑에서 거사를 모의하였고, 7일부터는 읍원정(揖遠亭)에서 송문상·김달곤 등이 동참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특이할 점은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 백산대회에 장령급으로 참여한 윤상홍이 68세의 고령으로 참여했다는 점, 주도 인물들이 신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는 점, 태인면사무소 직원이던 김현곤을 비롯하여 보통학교 훈도 김승호와 옹동면서기 송병옥 등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주도 인물 중에는 가수 송대관의 조부가 포함되어 있다.
3월 16일 태인 장날 정오를 기하여 의혈청년들을 중심으로 가두연설과 시위행진을 벌였고, 일본군 경찰을 피해 성황산과 항가산을 오가며 밤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80여 명이 헌병대에 잡혀갔다.

 

2-2. 태인 무극대도 터 / 미륵불교

?태인 무극대도 터 : 이곳은 현재 부산 감천동에 자리한 태극도의 전신인 무극대도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26년 보천교에 필적하는 웅장한 성전을 지었으나 193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다. 무극대도 본부 터는 태인면 태흥리 일명 도창현 치마바위 아래 있다. 창교주인 조철제는 만주에서 보천교 포교를 하다가 귀국하여 1921년 도호를 정산이라 짓고 1923년 12월에 ‘도장의 기지는 태인 도창현이 천장길방지지(天藏吉方之地)니라 (중략) 그러나 그곳에 치마바위가 있어야 한다.’며 본부 후보지를 태인 치마바위 아래로 정했다. 1925년 4월에 주요 건물인 영대와 도솔궁 등을 완공, 도명을 ‘무극대도’라고 선포, 1926년 6월에 나머지 건물을 지어 성전을 완공하였다. 교주 조철제는 보천교의 차천자와 맞서는 무극대도의 조천자로 불렸다. 1936년 일제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성전은 철거되고 건물들은 각지로 팔려나가거나 소각되었다. 1948년에 태극도로 교명을 바꾸고 이후 본부를 부산(보수동을 거쳐 감천동)으로 옮겼다. 태인의 무극대도 터는 여러 차례 전매되어 태인기술학교, 공장부지, 고물 수집소를 거쳐 폐허가 되고 현재는 대순진리회에서 매입하여 성지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태인 미륵불교 : 1934년에 수산 정인표가 설립한 증산계열의 교단이다. 정인표는 1934년 1월부터 인불(人佛)을 자처하면서, 증산의 수제자인 태운 김형렬이 이끌던 미륵불교의 교인들을 규합하였다. 무극대도 성전에 훼철되고 교단이 부산으로 이주하자 무극대도 3인자급인 장득원은 부산으로 이주하지 않고 남아 미륵불교 창건에 참여하였다.
1938년에 일본은 망한다는 ‘일망무지’를 기치로 내걸고, ‘신인동맹’을 조직하여 ‘항일 멸왜운동’을 진행하여 43인이 구속되는 등 고난을 겪었다. 한 교단에서 독립운동가 13인을 배출한 종교는 미륵불교가 유일하다.
일경에 체포된 이들은 심한 문초를 약 4년 동안이나 당하다가, 1943년 9월에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옥사한 신도도 나왔다. 1945년에 8월에 해방이 되었다. 이때 정인표는 감옥 앞에서 기다리던 가족을 뒤로 하고 고문을 받다 옥사한 제자의 가족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그 가족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정인표 이하 신인동맹 가담자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미륵불교가 미신사교 또는 사이비 종교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1997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참여자 중 13인에게 애족장이 수여됐다.
미륵불교는 1950년에 태인 태성리에 교단을 마련하였고, 1950년에 인제고등공민학교를 설립, 1951년에는 태인명륜고등공민학교를 인수, 1952년에 교단 본부를 태인면 태흥리 옮겨 새 성전 건축, 1955년 교주 정인표가 선화하였다. (신종교 연구자 안후상 외)

 

3. 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와 정산 송규 종사가 처음 만난 김해운의 집터로 전북 정읍시 북면 화해리 마동에 있다. 2000년(원기85) 수위단회에서 교단 성적지를 확정하면서 화해제우지도 교단의 23곳 성적지 중 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1917년(원기2) 정산은 스승을 찾기 위해 고향 성주를 떠나 전라도에 도착한 뒤 이름난 사찰과 도인을 찾아다녔다. 모악산 대원사에 잠깐 머물 때 정읍 북면 화해리 김해운의 청을 받아 그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1918년(원기3) 이곳을 찾은 소태산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장소이다. 소태산과 정산이 만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정읍에 사는 김해운이 태을주(太乙呪) 치성차 모악산 대원사에 갔다가 정산을 만나 감복하여 ‘조선에 없는 만국양반’으로 받들며 화해리 마동에 1918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 모시게 된다. 이 무렵에 강일순의 부인 정씨와 무남독녀 강이순(순임)이 마동 우물터 옆집에 살았다.
정산은 이곳에서 태을주 치성을 올릴 때 종종 이적을 보여 “경상도에서 온 송 아무개가 개안(開眼)했다”는 소문이 났다. 초여름 모내기를 앞두고 못자리 피살이가 한창일 무렵에 소태산이 화해리에 와서 정산을 만나 형제 결의를 하고, 두 달 뒤 김광선이 와서 장맛비 속에 정산을 인도해 영광군 길룡리에 갔다. 1986년(원기71)에 화해리 마동 동구 회나무 아래 소태산과 정산이 만난 것을 기념하여 ‘화해제우지비(花海際遇地碑)’를 건립했다. 소태산이 원불교의 창시자라면 정산은 원불교 창립기 여러 가지 제도적 기초를 세운 수립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대사전)

4. 증산 강일순 탄생지

강일순(姜一淳)은 본관이 진주(晉州), 이름은 일순(一淳),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이다. 1871년 9월 19일 아버지 흥주(興周)와 어머니 권씨(權氏)의 아들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438에서 태어났다.(실제 탄생지는 외가인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라는 주장이 있다)
우리나라 민족종교의 비조(鼻祖)라 불리는 강증산은 30세가 될 때까지 조선 8도를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고 1901년 7월 5일 모악산 대원사에서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증산의 종교사상은 최수운(崔水雲)의 동학사상과 함께 우리나라 근세사상의 쌍벽을 이룬다. 강증산은 천지공사를 통해서 혼란과 갈등의 선천시대를 마감하고 후천선경을 계획함으로써, 앞으로는 갈등과 전쟁 같은 혼란이 사라지고 상생과 대동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 하였다. 더불어 선경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주송수련을 통해 신화(神化)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말세의 극복을 위한 해원과 개벽을 위한 상생을 강조하는 등, 인존과 평화를 주창하였다. 1909년 6월 24일 현 김제시 금산면 동곡리 김형렬의 집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에 수부 고판례가 이적을 행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급증하였고 태을교, 보천교, 증산교 등 수많은 교단이 창시되었다. 현재 증산 강일순 탄생지의 정확한 생가 터를 찾기 위한 노력이 있으며, 성역화 사업이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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