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와 보리 대신 우리 밀을 심는 사람들이 있다. 농촌이 살아야 도시도 살 수 있다는 신념 아래, 땅을 살리고 생태를 회복하는 길을 택한 이들이 있다. 김제시 봉남면의 한 작은 농촌 마을이 ‘우리밀’로 일군 변화의 중심에 섰다. 전북 김제시 봉남면. 오랫동안 벼와 보리 중심의 전통적인 작물이 자라던 이곳 들녘에 최근 뜻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국산 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농업 산업 모델, 이른바 ‘밀 산업 밸리화 시범단지’가 이 지역에 조성되면서다. 이는 작물 변경의 차원을 넘어, 생산에서 저장, 제분, 유통까지 전 과정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엮은 선순환형 농업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국산 밀, 농업의 미래가 되다
현재 우리나라의 밀 자급률은 고작 2%대. 대부분을 외국산 수입 밀에 의존하고 있는 가운데, 국산 밀 산업은 오랜 침체기를 겪어왔다. 김제시는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과감한 시도에 나섰다. 농촌진흥청, 전북농업기술원 등과 협력해 2022년부터 ‘밀 산업 밸리화 시범단지’ 조성에 착수, 2024년 6월 사업이 완료됐다.
총 사업비는 30억 원. 국비와 지방비가 각각 절반씩 투입된 이번 사업은 제분시설 구축, 생산단지 조성, 품질관리 및 유통망 구축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전주기 농업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주체는 농업회사법인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대표 심상준)다. 17명의 전담 인력이 상시 근무하며, 지속 가능한 농업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가 제분시설로 품질과 생산성 두 마리 토끼 잡다
이번 사업의 성과 중 가장 주목할 점은 자가 제분시설의 설치다. 이전까지는 외부 위탁 제분 방식으로 연 800톤을 가공하면서 약 1억 5천만 원의 비용이 소요됐으며, 품질 편차 또한 큰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최신 기술을 접목한 자가 제분시설이 가동되면서 고품질 밀가루의 안정적 생산은 물론,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동시에 달성하게 되었다. 단순히 공장을 짓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생산과 저장, 제분, 유통의 전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데에 이 사업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192.8ha 규모의 밀 생산단지를 기반으로, 품종별 재배 교육 및 농자재 지원도 병행됐다. 수확 후에는 품질분석기(NIR)를 활용해 용도별, 품종별 저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된 밀가루는 국수로 가공돼 초록마을, 마켓컬리, 하나로유통 등 대형 유통망과 쿠팡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마크로드 제과, 강동오케익 등 중소 제과업체와의 직거래도 성사되면서 안정적인 판로도 확보했다.
△지역을 살리는 농업, 생태를 지키는 농업경영체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는 단순한 농업회사법인이 아니다. 유기농 벼와 친환경 잡곡, 국산 밀을 활용한 가공품까지 폭넓은 생산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들이 만들어내는 가공식품은 잼, 엿기름, 쌀과자, 현미식초 등으로 다양하다.
2024년 연 매출은 총 60억 원. 이 중 밀가루 및 밀가공품 매출이 16억 원, 원료곡 4억 원, 기타 가공품 매출이 40억 원을 차지했다. 고부가가치 가공식품 분야가 특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심상준 대표는 “우리는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며 “수입 밀보다 유통 기간은 짧지만, 국산 밀은 신선하고 안전하다.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고 밝혔다.
△지속 가능한 농업으로 가는 길
김제 ‘밀 산업 밸리화 시범단지’는 지역 농업이 미래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국산 밀의 경쟁력은 여전히 도전 과제다. 수입 밀 대비 높은 단가와 낮은 인지도, 소비자 신뢰 확보 등은 지속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다.
이에 따라 지역 교육기관과 연계한 소비자 교육, 품질 인증 시스템 도입, 공공 급식과의 연계 등이 제안되고 있다. 또한 정부 및 지자체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장기적으로 지속돼야 하며, 참여 농가 간의 협력과 기술력 강화도 중요한 과제다.

‘국산 밀’ 소비자에 다가가는 전북
밀은 세계 3대 곡물 중 하나로 빵과 국수를 만드는 대표 식재료이다. 그러나 빵을 주식으로 먹는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는 쌀을 주식으로 소비하기에, 그동안 ‘우리 밀’은 식량안보 작목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또한 밀과 벼의 이모작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벼’ 중심 농가에서는 밀에 대한 선호도가 낮은 실정이다. 그 결과, 오늘날 밀의 식량자급률은 2%에 불과하다.
코로나 이후 간편식 등 식생활의 변화로 식용 밀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최근 5년간(‘19~’23) 평균적으로 247만톤이 수입되어 ‘19년 이전에 비해 6.4% 증가되었으나, ’24년산 국내 밀 재배면적은 9,536ha, 생산량은 37천 여톤에 그치고 있다. 밀의 98%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주요 생산국에 가뭄이나 폭우 같은 이상기상이 발생하거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이 되면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
국산 밀은 수입산에 비해 가격이 2.5배 정도 높고, 품질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당장은 저렴한 가격에 품질 좋은 수입 밀을 활용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국내 생산 기반을 갖춰야 다가올 식량안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
밀과 이모작에 적합한 작목은 콩이다. 논콩은 식량 자급률 향상을 위해 지원하는 전략작물직불금 대상작목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밀과 논콩의 주산지인 전북은 밀 산업 밸리화 시범단지로 생산 기반과 제분시설을 갖추고 있어, 밀 자급률 향상에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산 밀은 원료곡의 안전성이 높아 소비자 만족도가 높다. 이러한 장점을 활용하여 홍보를 강화하고 재배면적을 확대해 간다면 자급률을 높이고 소비를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입밀과 동등한 품질과 가공제품 특성에 맞는 우수한 품종을 육성 보급한다면 소비자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