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일보 국제문화아카데미 제1기 2학기 첫 번째 강의가 19일 전주 시그니처호텔에서 정우철 전시해설가를 초청해 ‘내 인생을 바꾼 명화 한 점’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정우철 전시해설가는 “클림트 하면 ‘키스’라는 작품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공항에 가면 ‘클림트의 키스를 보지 않았다면 다시 돌아가라’고 써 있을 정도”라며 “하지만 생전 그에게는 더 유명한 그림이 있었다”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면서 “생전에는 가난했다가 사후에 알려진 예술가들도 있지만, 클림트처럼 어떤 계기로 성공한 이들도 있다”면서 그들의 ‘출세작’에 대한 운을 뗐다.

정 도슨트는 이날 강의에서 생전 한 작품을 계기로 많은 인기를 누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폰스 무하, 구스타프 클림트의 ‘출세작’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가장 먼저 르누아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상주의 화가인 르누아르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고 불렸고, 그만큼 그의 그림 속에는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등장한다”면서 “이는 그의 삶이 가난하고 불행했던 것과 대조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르누아르의 진정한 출세작은 1878년 그린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그가 자신의 인상주의적 특징을 양보하고, 후원자의 구미에 맞춰 고전주의 양식으로 칠한 작품”이라며 “화가 자신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작품을 그렸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이후 인상주의를 옹호하는 여론이 생기면서 생활이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뱃놀이 일행의 오찬’ 등 작품들도 선보였다.

다음으로는 포스터의 예술성을 끌어올린 것으로 이름을 알린 ‘알폰스 무하’가 처음 어떻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우철 해설가는 “당시 연극 포스터 작가들은 예술가로 취급받지 않았다. 정해진 양식을 따라 그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라면서 “그 때 30대까지 인쇄소 전용 디자이너로 일하던 무하는 ‘사라 베르나르’라는 당대 유명 배우의 그림을 맡으면서 유명해졌다”고 이야기했다.

크리스마스날 홀로 출근한 무하에게 당장 포스터가 필요했던 사라 베르나르의 매니저가 일감을 맡긴 것이 계기가 됐다. 무하가 완성한 2m짜리 거대 포스터는 그 전의 양식과 전혀 달랐지만, 사라 베르나르 본인이 ‘나를 그린 것 중 가장 아름답다’면서 채택했다는 것.

정 도슨트는 “이후 일본 목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무하의 그림은 기존 포스터들의 규칙을 깨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면서 “이후에도 무하는 대중들에게 아름다운 포스터를 선보이며 거리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전시장’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키스’로 이름을 알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전출세작으로는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을 소개했다. 젊은 클림트가 해당 작품을 계기로 초상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정우철 해설가는 “젊어서 돈과 명예를 얻은 클림트는 이후 가족들을 잃는 등 암흑기를 겪은 이후 자신이 진정 그리고 싶은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키스’ 등 유명한 작품은 당시의 깨달음 이후 그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늘 소개한 작가들은 대세를 읽을 줄 알면서도 본인만의 스타일을 놓치지 않은 이들”이라며 “특히 유럽의 경우 출신 화가를 모르고 가는 것은 그 나라의 절반만 알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미술관에 갈 때나 여행을 갈 때 나라 국적별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미리 알아보면 여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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