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김만균과 아버지 김천령, 아들 김경원 3대가 모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문과는 지극히 어려웠던 시험으로 3대가 연이어 문과에 장원급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김만균은 중종대에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명종 원년(1546)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다른 아들 김명원도 선조 16년(1583)에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올랐다.

 

▶급제자 한 명 내기도 어려웠던 문과시험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인재 등용책이자 고도의 통치술이다. 인재를 뽑는 것이 과거시험이지만, 조선정부는 사대부들을 위무하고 그들을 끌어안는데 과거제를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정치, 경제, 사회 제반을 움직이는 중심축의 하나였다. 이러한 과거제의 가장 중요한 시험이 문신을 뽑는 문과(대과)이다.

문과는 급제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조선왕조 5백년간 문과(대과) 총급제자수는 14,620명이다. 이를 연평균으로 계산해 보면 1년에 평균 29명이 급제한 것이 된다. 조선이 330개 군현이니 매년 한 군현에서 문과 급제자 한 명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 계산으로도 확인된다.

전라도에서 가장 많은 문과(대과) 급제자를 낸 곳이 남원이다. 송만오의 연구에 의하면, 남원 출신 급제자가 총 133명으로 평균 3.8년에 한 명의 급제자가 나왔다. 이는 많은 급제자를 낸 경우로, 보통은 10년이 넘어도 한 군현에서 한 명의 대과 급제자를 내기가 어렵다. 백 년에 한 명의 대과 급제자가 나오는 곳도 여럿이며, 160여 년만에 한 명의 대과 급제자가 나온 군도 있다.

 

▶아버지 김천령, 진사시와 문과 모두 장원

김만균은 경주김씨로, 개국공신 김균의 5대손이다. 김균은 조선건국 후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어 좌찬성에 오른 인물이다. 김만균의 증조부는 문과에 급제하고 한성판윤을 지낸 김종순이다.

김만균의 아버지 김천령(金千齡, 1469~1503)은 21살 때인 성종 20년(1489)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연산군 2년(1496) 식년시 문과에 27세의 나이로 장원 급제하였다. 진사시와 문과에 모두 1등, 장원으로 오른 것이다. 그것도 어린 나이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은 사헌부 집의(종3품)를 지내고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김천령은 정침(鄭沈)의 승진을 반대하는 등 연산군과 맞서다가 재주만 믿고 위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여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신권(臣權)을 억누르려고 했던 연산군의 눈에, 진사시와 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하고 가문도 좋은 김천령이 좋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실록의 김천령 졸기에 그를 평하기를, “외모는 온화하나 속이 강하여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아 집의(執義)가 되어서도 긴절하고 곧은 말이 많았다.”고 하였다. 또 실록에 그를 평하기를,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되 태연하게 지냈고, 죽어서는 집에 유산이 없었다.”고 하였다.

 

▶김만균, 장원급제하고 전라감사를 역임

김만균(金萬鈞, ? ~1549)의 자(字)는 중임(仲任)이며, 그의 출생년은 밝혀져 있지 않다. 김만균은 종숙 김인령(金引齡)에게 양자로 들어갔는데, 양부 김인령도 문과급제자이며 김인령의 아버지도 문과급제자이다.

김만균은 일찍이 문명(文名)이 있어서 과거 급제 전에 성균관의 천거를 받고 벼슬에 나와 참봉이 되었다. 그는 중종 10년(151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중종 23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별시의 총 급제자는 19명이었다.

문과 급제 후 홍문관 수찬과 부응교, 사헌부 장령, 사간원의 우두머리 대사간(정3품 당상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 39년 예조참판(종2품)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전라감사에 부임한 것은 명종 1년(1546) 3월이다. 1년간 전라감사로 재임하고 이듬해 3월에 교체되었다.

전라감사 재임 때인 명종 1년 7월에 중국배가 녹도에서 파선되어 배에 타고 있던 254명 중 절반이 물에 빠져 죽었으며, 9월에는 큰 왜선 3척이 안도(安島) 동라구(冬羅仇)에 출몰하였다. 12월에는 전라도 무장, 흥덕, 장성, 고창, 진원에서 천둥이 크게 쳤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김만균은 동지중추부사로 재임 중에 죽었다. 실록의 졸기에 사신이 그를 평하기를, “젊었을 때 경박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장성하자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알아서 끝내는 중후한 사람이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비록 절도가 분명하지 못하였으나 감사로 있을 적에 수령들의 고과(考課)는 매우 엄정하였다.”라고 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들 김경원 장원급제, “삼세장원”

김만균의 아들 김경원(金慶元, 1528년생)은 명종 8년(1653) 26세의 어린 나이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별시 급제자는 총 41명이었다. 문과 급제자 명부인 『문과방목』의 김경원 이름 밑에, “삼세장원(三世壯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3대가 문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이다. 김경원은 이후 홍문관 부교리(종5품), 부평 부사(종3품), 병사(종2품) 등을 지냈다.

김경원의 장원급제에 대해, 실록에 사신의 부정적인 평도 있다. “성적을 매긴 것이 정밀하지 못하여 학문이 없는 김경원이 장원을 하였다. 사람을 뽑는 것이 지나쳐서 요행으로 급제한 자가 많았으니,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 주지 못하였다.”

3대가 연이어 장원급제한 집안은 이 경주김씨 가문 외에, 인현왕후를 배출한 여흥민씨 집안이 알려져 있다. 아버지 민광훈, 아들 민정중, 손자 민진장이 3대에 걸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민정중의 동생 민유중이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민씨 가문의 장원은 알성시, 정시, 별시 등 소수의 선발 인원 중 장원이다.

양대가 문과에 장원 급제한 집안으로 조선초 대학자인 권근의 아들 권제와 손자 권람을 들 수 있다. 아버지 권제와 아들 권람은 모두 임금의 특차로 장원에 올랐다. 『문과방목』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권람은 세조와 한명회를 연결시킨 인물이다.

 

▶차자 김명원, 전라감사를 지내고 좌의정 역임

김만균의 차자(次子) 김명원(1534~1602)은 자(字)가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다. 김경원의 아우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명종 13년(1558)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종 16년에 식년시 문과에 갑과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평안병사, 호조참판을 거쳐 선조 16년(1583) 3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3개월만인 6월에 바로 이임하였다. 전라감사 재임시에 본도의 사정이 판관 1명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우니 평양의 예와 같이 서윤(庶尹)을 가설(加設)할 것을 청하였다.

이후 함경감사, 형조판서, 도총관, 경기감사를 지내고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해 선조 22년 정여립 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우고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경림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 도원수가 되었으며,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선조 33년(1600)에 우의정, 이듬해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장원급제는 못했으나 벼슬은 부모 형제 중에 가장 높이 올랐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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