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화산서원비(도문화재자료, 문화재청)
▲ 송인수 신도비(청주, 도기념물, 문화재청)

 

 

송인수는 전주 화산서원에 이언적과 함께 배향된 성리학자이다. 기호사림의 핵심 인물로 사림의 시대를 열어가는데 지대하게 공헌하였으며, 중종 38년(1543) 45세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까지 1년 넘게 재임하였다. 은진송씨로 우암 송시열의 종증조부가 된다.

▶은진송씨, 송시열의 종증조부
송인수(宋麟壽, 1499~1547)는 충청도 회덕에 세거한 은진송씨이다. 그는 한양 반송방 유점동(鍮店洞, 현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세량(宋世良)은 회덕 태생이다.
송인수의 자(字)는 미수(眉?)ㆍ태수(台?), 호는 규암(圭菴)이다. 아버지 송세량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숙부 송세충, 조부 송여해, 증조부 송순년 등이 모두 문과자들이다.
은진 송씨는 회덕(지금의 대전)에 대대로 세거해온 명문거족으로 광산김씨, 파평윤씨와 함께 충청도 3대 명문이다. 회덕의 은진송씨를 대표하는 인물은 ‘양송(兩宋)’으로 일컬어지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이다.
우암과 동춘은 13촌간이며, 우암의 할머니와 동춘의 할머니가 형제지간이다. 동춘이 한 살 위로 우암은 어려서부터 동춘을 아저씨라고 하지 않고 형이라고 불렀다. 동춘과 우암은 어려서부터 같이 공부한 각별한 관계였다. 
우암과 동춘은 한 집안으로 한 시대를 끌어가면서 회덕의 은진송씨를 명문거족으로 만들었다. 송인수는 이러한 송시열과 송준길에 앞서 은진송씨가의 기반을 구축한 인물이다. 송인수는 우암 송시열의 종증조부로, 우암의 증조할아버지 송구수(宋龜壽)의 아우이다. 

▶성균관대사성과 예조참판 역임
송인수는 조광조와 시차를 두고 스승 윤탁의 문하에서 공부한 동문이다. 조광조가 송인수보다 17살이 많은 선배이다. 송인수는 또 아버지와 친분이 깊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인수는 중종 16년(1521)에 23살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였으며,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ㆍ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유배되었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예조참의가 되고 승정원 동부승지,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유학 장려
송인수는 송순의 후임으로 중종 38년(1543) 2월에 전라감사에 제수되어 3월에 부임하였으며, 1년 넘게 재임하다가 이듬해 가을에 이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9년조에, 조헌이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김안국ㆍ송인수는 양남(兩南)에 관찰사로 나가 은택과 교화를 베풀어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덕택을 입고 있다.”라고 하였다. 
허균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서, 송인수가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남평 현감 유희춘, 무장 현감 백인걸과 셋이 뜻이 맞아 매우 즐겁게 지냈다고 하였다. 남평은 지금의 나주, 무장은 지금의 고창에 편제되었다. 송인수가 늘 글을 보내어 이들을 불렀고, 항상 함께 다녀서 도내 사람들이 ‘세 차비[三差備]’라고 불렀다 한다.
송인수는 효우와 절의가 뛰어난 전라도내 47인을 뽑아 장계를 올렸다. 그 내용이 실록에 실려 있는데, 효와 관련한 당시의 생활상과 그가 일도를 책임진 방백으로서 효에 기반한 유교사회를 뿌리내리게 하려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장계의 일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전주 유학 유승적은 3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5세에야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고서 애통해 사모하였다. 전주 유학 최응사는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똥을 맛보며 울부짖었었는데 병이 드디어 나았다. 
또 김제 생원 나응허는 아우 3명이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했으며, 아버지 상사를 만나자 아우 3명과 함께 시묘살이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태인 진사 정언충은 아버지의 상중(喪中)에 있을 때 아버지의 묘소에 갈 적이면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았다. 

▶윤원형 세력에게 희생된 사림의 주역
송인수는 인종 즉위 후 형조참판으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명종 즉위년(1545)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내친 을사사화 때 송인수는 한성부 좌윤으로 있다가 파직당하고 청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난지 2년후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고 이때에 그가 지난날에 윤원형을 탄핵한 것이 빌미가 되어 49세에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명종 2년(1547) 정미년에 발생하여 정미사화라고도 한다. 과천의 양재역에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나라를 망친다는 벽서가 붙어 야기된 사건이다. 
이때 송인수를 비롯하여 많은 사림(士林)들이 희생되고, 중종의 아들 봉성군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고 하여 사사(賜死) 되었다. 선조 즉위후 이 사건은 무고로 처리되어, 이에 연루되어 희생된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신원이 이루어졌다. 송인수도 선조 즉위년에 신원되고 적몰된 가산을 돌려받았다.
송인수는 성리학에 밝았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이조민은 『괘일록』에서 송인수를 평하기를, “덕망이 매우 뛰어나 사림들이 의지하고 존중하기를 태산(泰山)이나 북두(北斗)와 같이 하였다.”고 하였다. 
송인수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 『규암집』이 있으며 국역본도 출간되어 있다. 송인수에 관한 연구논문도 여러 편 나와 있다.

▶전주부성 옆 화산서원에 배향
화산서원(華山書院)은 전주의 가장 오래된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으로 선조 11년(1578)에 창건되어 효종 9년(1658)년에 사액되었다. 사액서원은 국가에서 공인한 서원을 말한다. 이 화산서원에 송인수가 이언적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언적은 향교 문묘에 공자와 함께 모셔진 동방 18현으로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서원은 보통 산수가 뛰어난 곳에 건립되는데 화산서원은 특이하게도 전주부성 곁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모셔진 인물들의 성격이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또  성현을 전주부성에 가까이 두고 전주사람들에게 본받게 하여 교화를 이루려는 차원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화산서원비는 현종 5년(1664)에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건립한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송인수, 송시열, 송준길은 한집안 사람들이다. 서원내에 자리했을 원정비 화산서원비는 현재 예수병원 뒤 산자락으로 옮겨져 위치하고 있으며 근래 비각을 건립하여 모시고 있다.
화산서원은 고종 6년(1869)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94년에 완주군 소양면 신월리에 옥천육씨의 협조로 육대춘을 추배하여 복원되었다. 송인수는 화산서원 외에도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노봉서원(魯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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