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리는 유럽의 거리. 곳곳에 있는 근대 유적들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도 근대 유적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군산이다. 군산은 근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 중 하나이자, 뼈아픈 일제 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도내에서 유일한 항구 도시 군산. 특히, 월명동, 신흥동, 장미동 일대의 ‘군산근대문화유산 거리’는 근대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의 독특한 이국적인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000년 무렵 이곳의 근대건축물을 활성화해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군산시는 ‘근대문화 도시 조성’에 나섰고, 2008년 ‘근대산업유산예술창작벨트화 사업’, 2014년 ‘도시재생 선도사업’ 등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이 선정되면서 근대 유산을 가꿔 나간다.

■국내 현존하는 3대 서양 고전주의 건물 ‘호남관세 박물관’
대한제국(1908년)에 만들어졌으며 당시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해 건축했다는 설이 있다.
군산세관은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건물만이 남아 있으며,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05년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제1차 군산항 축항공사기간 (1905~1910) 중인 1908년(순종2년) 6월에 만들어졌다. 서양식 단층 건물로 건평은 약 69평 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 낸 것은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군산신흥동 일본식 가옥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 가옥)은 부협의회 의원이며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이 주택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 지역이었다.
히로쓰 가옥은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구 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 명의로 넘어가 오늘날까지 한국제분의 소유로 돼 있다.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등 많은 한국영화가 이 주택에서 촬영 될 정도로 일반에 잘 알려져 있어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3호로 등록됐다.
구 히로쓰가옥은 목조 2층 건물로 벽체는 심벽에 목재 비늘판벽과 회벽으로 마감했으며, 지붕은 박공지붕과 합각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자연석을 깐 기단뒤에 방형 초석이 놓이고 그 위에 가느다란 사각기둥이 세워져 지붕가구가 짜여진 방식이다. 현관부분의 지붕은 박공지붕과 모임지붕 형식인데 처마 밑에 함석판을 덮은 차양이 덧달아져 있고 2층 부분의 지붕은 합각지붕 형식으로 처리되었는데 전면에 부섭지붕이 달려 있다.
야시키형식의 대규모 목조주택으로 2층의 본채 옆에 단층의 객실이 비스듬하게 붙어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다.

■군산 남조선 전기주식회사
구 남조선전기주식회사는 1935년 2층 규모로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모서리 모양을 한 대지의 특성을 반영해 건축물의 모서리 부분을 곡면으로 처리하고 그 부분에 주 출입구를 두었다. 현관과 계단, 외부의 굴뚝이 이루는 조형적 감각이 돋보이는 이 건물은 건축적 모더니즘을 잘 보여 준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시작한 이후 조선의 경제를 식민지 체제 아래 놓아두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펴나갔다. 그들의 식민지 경제정책 중 산업발전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를 위해 전력산업은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남조선전기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군산에 거주하는 사람 중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전등, 전기기구, 전차 등 전기를 이용한 산업시설 등을 설치하고 보급했다. 이것들은 당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 시설이자 지역 산업 발전의 척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본 시설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주민들은 남조선전기주식회사가 공익사업으로서 최소한의 역할(가격인하, 품질서비스개선, 설비투자 증대)을 해주기를 요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족별 차이는 있었지만 남조선전기주식회사에서는 요구를 받아들이며 산업발전에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까지도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자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군산 경제 발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사택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사택은 1934년 사용 승인된 것으로 건축물 대장에 기록돼 있다.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사택은 목조 1층 건물로 중규모 정도의 목조 주택이다. 벽체는 심벽에 회벽으로 마감했으며 지붕은 모임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건물의 전면 창호에는 차양을 달았고 부분적으로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앞뒤로 부분적으로 돌출이 있는 평면의 건물로, 건물의 앞쪽에 정원을 두었다. 현관과 복도를 따라 6개의 방과 욕실, 창고,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구 조선운송주식회사 사택이 위치한 군산시 구영신창길 73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구획한 도시계획지구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 지역은 군산지역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정착할 목적으로 일본식 주택, 상가, 관공서 건물 등이 들어서게 됐다.
현재는 시간의 소요와 각 건축물들의 소유자 변화 및 관리 부실 등 여러 이유로 그 흔적이 많이 사라진 상황이다. 그러나 구 조선운송주식회사의 경우 1932년 해당 부지에 건립된 이후 붙임은 있었지만, 현 소유주의 지속적 관심과 관리로 군산지역에 있는 근대 건축물에 비해 보존 상태가 양호한 상황이다.
양호한 보존 상태로 인해 우리는 해당 건축물을 통해 1930년대 일본식 가옥의 건축적 특징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군산지역 주택환경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이 가능하다. 해당 건축물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상황으로 건축물과 당시의 이야기가 결합돼 새로운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활용이 가능하다.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 ‘부잔교’
뜬다리란 부두에 네모진 모양의 배를 연결하여 띄워서 수면의 높이에 따라 위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만들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이다.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는 1926년에 만들기 시작해 1938년에 완공했다. 이 뜬다리 부두는 군산항의 육상 영역에서 선박으로 연결되도록 했으며, 육상 연결부가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회전이 가능하도록 하고, 여러 대의 대형 선박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는 철도를 통해 군산항으로 운송되어 온 쌀을 선박으로 옮길 때 사용됐으며,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시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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