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운동
1895년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전라북도지역에서는 의병활동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로 인한 지역의 항일운동 분위기가 크게 위축되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부터 전개된 중기의병 활동기부터 전라북도지역에서도 대대적인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전라북도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의병부대는 태인의병이었다.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이끌었던 태인의병은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봉기를 결의한 뒤 정읍과 순창을 거쳐 남원을 공략하기 위해 곡성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없는 유생과 농민군이었던지라 10여일 만에 지도부가 피체되자 의진은 해산되었다.
전라북도의 동부지역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지나는 지역으로, 덕유산․지리산․회문산 등을 비롯하여 비교적 높고 험한 산이 많다. 이런 지형적 특징은 이 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자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회문산은 계곡이 험한데다 서부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하여 이 시기 수많은 의병부대의 거점으로 호남 의병투쟁의 핵심적 위치를 점하였다.
후기의병의 활동기간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투쟁이 전개되었던 1908-1910년, 순창 출신으로 회문산 일대에서 활약하여 의병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의병장급 인물만도 양윤숙(楊允淑)․양경학(梁景學)․최산흥(崔山興)․진치언(陳致彦)․김선여(金善汝) 등 10여 명에 달한다. 임병찬(林炳瓚)이 최익현(崔益鉉)과 뜻을 같이하여 의병을 훈련시켰던 곳도 회문산 북록의 상종성이었다는 사실은, 의병투쟁사에서 회문산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소백산맥의 준령인 덕유산과 그 일대도 전라북도 의병활동의 또 다른 중심무대였다. 덕유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동부 산악지대는 전라북도 출신만이 아닌 경상도와 충청도 출신 의병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하였다. 문태서(文泰瑞)․김동신(金東臣)․신명선(申明善)․박춘실(朴春實)을 비롯한 의병장이 다수의 의병을 지휘하여 적들과 수백 차례의 교전을 벌이고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덕유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지리적 조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이외에도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며 한때 남원읍성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던 양한규(梁漢奎), 진안․임실․장수 일대에서 적들과 수많은 교전을 벌였던 임실 출신의 이석용(李錫庸), 고창 출신으로 3형제가 모두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던 고석진(高錫鎭) 등 전라북도 출신 의병의 활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의병활동에 구역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전라북도 출신 의병의 활동이 전라북도에만 국한되지 않은 것 또한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주 출신의 강무경(姜武景), 진안 출신의 황준성(黃俊聖), 임실에서 출생하여 장수에서 성장한 전해산(全海山)은 전라남도 서부와 해안지역에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창 출신의 서종채(徐鍾採)․이철형(李哲衡)은 전라남도 출신 의병장인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완주 출신의 유지명(柳志明)은 충청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해방까지 반세기 동안 전개된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전라북도의 위치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후기의병기의 처절한 의병투쟁이다. 다만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선열의 사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해 그들의 생가나 활동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 3․1운동
전라북도 출신 인물들의 3.1운동 참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장수 출신의 백용성(白龍成, 불교계 대표)과 임실 출신의 박준승(朴準承, 천도교 대표)이 참여하였다. 또한 김제 출신의 정노식(鄭魯湜)은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익산 출신의 임규(林圭)는 일본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통고문 및 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보다 앞서 정읍 출신의 나용균(羅容均)과 고창 출신의 백관수(白寬洙)는 일본 토오쿄오[東京]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나용균은 중국에서, 백관수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라북도 출신의 인사들이 3·1운동 무렵 경향 각지의 인사들과의 비밀리에 연락을 하고 있었고 3월 1일 이후에는 연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만세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전라북도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1일을 전후한 시기였다. 기독교 계통으로 군산 영명학교에 전달되고 천도교 계통으로 전주에 전달되어 다시 임실에 도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라북도의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5일과 6일, 군산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호남 최초의 만세시위운동이었고 영향은 전라도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3월 5일 군산시위를 필두로 전라북도에서 있었던 3.1운동은 전주, 군산, 이리, 김제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지역으로 확산 되었고, 임실 천도교를 중심으로 순창, 정읍, 남원, 진안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독립만세 시위가 읍면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시위 양상은 평화시위에서 무력충돌이 빈발하였다. 또한 면리 지역에서는 산상 횃불시위 양상도 나타났다. 이 가운데 4월 4일 익산 솜리장터에서 있었던 독립 만세시위 과정에서 일본 헌병경찰에 의한 문용기 열사의 순국 참상은 전북지역 3.1운동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라북도에서 이루어진 4월말까지의 독립만세 시위 상황을 대략적으로 추계해보면 약 80여회의 만세시위에 1만3천여명이 참여하였고 사망자 38명, 피검자 930명, 기소자 74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 해외독립운동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해외독립운동에 전라북도 출신 인사들도 다수가 참여하였다. 해외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가며 분투한 전라북도 출신 독립운동자들은 김제․옥구․정읍 등 대부분 전라북도 서부권 출신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라북도 출신 해외독립운동가는 무정부주의 계열 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부안 출신으로 정읍에서 생활했던 백정기(白貞基), 김제 출신의 정화암(鄭華岩)은 모두 중국을 무대로 활약한 무정부주의 계열 인사들이다. 이 두 사람은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척살하려 했던 이른바 ‘육삼정(六三亭)’ 사건의 주모자였다. 이외에도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며 중국을 방문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한 이종희(李鍾熙), 만주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현지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김영현(金寧炫),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에 기여했던 이인식(李仁植), 신민부 유격반장으로 하얼빈에서 민족반역자 숙청작업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던 채세윤(蔡世允), 청산리대첩에 참가하였으며 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고평(高平) 등이 모두 전라북도 출신으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렸던 인사들이다. 

■ 학생운동
여타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라북도지역 신식교육기관의 상당수는 한말과 일제 초기에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계에 의해, 혹은 일제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그러나 설립과 운영의 주체를 불문하고 전라북도 지역의 각 학교들은 일제시기 내내 그 지역 내 항일의식을 포섭하는 곳이었다. 학교 내에 잠재된 항일의식은 수시로 일정한 계기를 만나면 항일운동으로 분출되었다.
예를 들어 호남에서 맨 처음 발생한 군산의 만세운동은 영명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군산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의 시위는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되던 학교이며 교직원 중에도 일본인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동향을 엄중히 감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14일에는 학생 70여 명이 동맹하여 퇴학원을 제출하여 학교 당국을 당황하게 하였다. 나아가 학생들은 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결정하고 3월 23일 밤에 학교에 방화한 대표적인 학생운동이었다.
전라북도 각지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생계는, 일제의 황민화교육이 더욱 강화된 1930년대 이후에는 비밀결사 조직, 맹휴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하 전라북도 학생운동의 중심은 도내 여타 지역에 비해 학교가 많았던 전주였다. 기전여학교․신흥학교․공립농업학교․전주사범학교․전주고등보통학교 등 전주부에 소재한 각 학교에는 모두 기독교청년회, 독서회 등 이름의 단체가 조직되어 혹은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이리농업학교의 화랑회, 정읍농업학교의 독서회, 순창농업학교의 화령회 등등, 전라북도 지역의 학생운동은 일제 통치시기의 전 기간을 통해 계속되었다.

■ 농민․노동운동
전라북도 서부지역을 흐르는 만경강과 동진강 연안의 전주·익산·옥구·김제·정읍·부안 일대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가 펼쳐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국내 유수의 미곡 산지를 이루는 이 지역은 이런 이유로 한말과 일제시기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일제시기 이 지역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 곳곳에 산재하여 수많은 우리 농민을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일본인 농장주의 압박과 수탈은 한인 소작농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족투쟁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의 횡포와 착취에 맞선 옥구지역 농민들은 1927년 8월부터 11월까지 전후 7차례에 걸쳐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옥구소작쟁의는 그 규모와 활동내용면에서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소작쟁의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도내 곳곳에서 수시로 발생한 대소규모의 소작쟁의는, 전라북도의 지리적․경제적 특성에 기인한 대일항쟁사의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호남평야의 쌀 수출항이었던 군산항 부근에는 많은 정미소들이 있었고 정미소 미선공의 항일운동은 군산 부두노동자운동과 함께 전라북도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사회운동이다.

■ 문화운동
전라북도 출신으로 일제시기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민족지도자로서 이름을 떨친 이들도 적지 않다. 김병로(金炳魯)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6․10만세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변론을 자청하는 등 활발한 변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하여 존경받는 민족지도자로 자리하였다.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 이른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정인승(鄭寅承)과 이병기(李秉岐)의 활동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2․8선언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고창 출신의 백관수(白寬洙)는 이 일로 1년간 복역한 뒤 안재홍(安在鴻)․홍명희(洪命憙) 등과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만들어 민족운동의 조직을 육성하려 하였다. 그는 또한 민족주의진영의 단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고,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는 등 일제하 민족주의진영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활약하였다.

■ 일제의 통치 탄압기구와 수탈기구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는 군대와 경찰의 무력에 바탕한 강압적인 통치였다. 따라서 각 지역의 대표적인 탄압기구는 경찰관서였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경제 침탈 역시 조선의 대표적인 평야지대인 전라북도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대표하는 수탈기구가 일본인 농장과 수리조합이었다. 1927년 현재, 조선에 소재한  소유지 30정보 이상의 일본인 농장은  247개소였고 이 가운데 28%인 70여개 농장이 전라북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3천만 평에 달했다.  전라북도에는 당시 농업수탈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인 일본인 농장과 수리조합 건물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일제의 수탈과 착취, 민족적 차별은 일본인 경영 농장의 농업생산 과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라북도의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미곡이 집적되고,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 도정작업이 이루어지는 중심지였다. 이런 필요에 의해 일제시기 군산에는 일본인 경영의 수많은 정미소가 세워져 이른바 ‘정미소 거리’를 이루었고, 여기에서 일하는 남녀 노동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일본인 노동자와 임금차별 심화는 정미소 노동자들의 항일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24년부터 10년간 수없이 많은 대소규모의 파업을 단행하였다. 군산 정미소 거리 노동자들의 파업은 일제시기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노동계의 항일투쟁이었다.

/신순철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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