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간지의 극동 특파원 메킨지 기자가 본 '한국의 독립운동'( Korea fight for freedom :1920)에 일본의 헌병과 경찰이 한국인을 대나무와 쇠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여학생들의 옷을 벗기고, 담뱃불로 살을 지지고 엄지손가락을 묶은 다음 매달아 두들겨 패는 등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 모습을 본 미국인이 며칠간 악몽에 시달려 잠을 못 잤다고 실토했다는 증언이 실렸다.
1919년 3월 1일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됐던 3.1 독립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3분의1이 참여한 거대한 민족운동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자와 참여하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운동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행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그 공훈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전주시의 경우도 3.1운동 참여자 60여 명 중 23명만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돼 미추서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다.
태인 김부곤씨는 3.1운동을 주도했으나 그 공적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해 서훈을 받지 못했다.
정읍 안순용씨의 경우도 여러 기록이 있으나 공훈신청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항일운동에서는 그 이름과 행적을 숨겨야 했기에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많은 인물들이 있다.
이러한 분들의 공을 잊지 않아야 하겠기에 전주 거지왕 이거두리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한다./

◆김부곤

정읍시 태인면 김부곤(金富坤) 선열의 유족 김금숙씨에 따르면 태인면 3.1운동 기념탑에는 독립운동 유공자로 김부곤 선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그 봉안소에 모셔진 선친 동지의 위패 선열은 다 같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돼 보훈 예우를 받고 있는데 반해 김부곤 선열은 아직 국가유공자로 예우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 김부곤 선열은 나이 불과 18세로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문을 손에 쥐고 태극기를 흔들며 앞장서 돌진하다가 끝내 투옥됐다.
이어진 여러 혹독한 고문과 형벌에 더해 지병이 더해져 나이 49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김부곤은 해방되기 전까지 상해 임시정부 독립군에 독립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오세창 선생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고, 연락 비밀조직원에게도 자금을 전달했다는 게 김금숙씨가 모친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은 김부곤의 집 사랑채에서 김금숙씨의 선친과 함께 1박하며 서예를 즐겼다는 내용도 있다.
김금숙씨 모친에 따르면 자금 조달에 있어 태인 거부의 도움이 지대했고, 이후 김부곤이 독립자금을 조달하려 지인들을 설득하던 중 밀고를 당해 일본 헌병대에 체포당했다. 김부곤이 목숨 걸고 근거 노출을 알리지 않자 일본은 명예훼손죄로 김부곤을 투옥했다. 이후 옥중에서 온갖 고문과 처벌에도 김부곤은 오직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국가보훈처 공훈록(3권) 김현곤(金玹坤) 편에도 김부곤의 활동이 기록돼 있다.
김금숙씨는 "선친은 김현곤 선생과 똑 같은 항일운동 활동에 나섰던 바, 선친 역시 국가보훈처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안순용(安順瑢 1881~1908)과 박씨 부인

다음은 대한효열록 상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자 순창 신보현과 접촉해 국권을 회복하기로 뜻을 세웠다. 장정을 모아 백동국과 합세해 순창·정읍 등지에서 비밀리에 활약하면서 많은 왜적을 죽이고, 흥덕에 이르러 밀정 조씨의 밀고로 왜헌에 붙들려 흥덕의 병참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그는 태연한 빛으로 "내 반드시 너희들을 섬멸하리라"고 꾸짖으니 왜헌이 거물이라 하고 더욱 모진 형벌을 가해 사지가 감각이 없고 의식을 잃으니 왜놈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끌어다 매장하도록 했다.
산으로 끌고 가서 매장하려는데 실낱같은 숨을 쉬며 깨어나자 매장꾼들이 거짓무덤을 만들어 매장한 체하고 그를 피신시켰다. 그 후 다시 조씨의 밀고로 총살당했는데, 그의 어머니와 맏형 흥용, 부인 박씨가 시신을 거두어 돌아오다가 조씨를 만나 흥용이 쳐서 넘어뜨리고 부인 박씨가 배를 갈라 창자를 끌어내어 죽인 후, 병참으로 들어가 박씨 부인이 "남편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고, 나는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셋이 다같이 10년 형을 받아 어머니는 아들의 대상날에 옥중에서 분사했고, 형 흥용은 수원에서, 부인 박씨는 대구에서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2년 감형을 받고 출옥했다.
집에 돌아왔으나 시아버지는 늙어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고 당시 세살이던 아들 영태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으며, 살림은 탕진되어 살 길이 막연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왜경의 감시를 받아가며 조씨 가족의 보복이 두려워 저녁이면 피신하면서 살아가는 정상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시아버지의 초상을 당해서는 3년을 하루같이 성묘하여 슬피 울며 절했다. 고을 선비들이 그의 나라를 위한 충성도 거룩하지만 약한 여자로서 남편에게 열행을 지켰고 나라에 충성했으며 시부모에게 효도한 박씨 부인의 지절을 더욱 추앙하고 있다.

◆이거두리(李普漢)

이거두리(이보한)는 전주문화원 '호남제일성 2006 상반기 통권 111호' 인물탐구에 나오는 사람이다.
이거두리는 일제 강점기 전주에서 활동한 실존 인물이면서도 숫한 전설을 남겨 소설이나 전설속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때로는 거지대장'으로 '미치광이'로 '전도자'로 '독립운동가'로 '청년회장'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종횡무진 자유인으로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를 아침저녁으로 외치며 살아온 인물로, 당시 '이보한'은 몰라도 '이거두리'라면 전주부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제 식민지시절 전주의 상징적이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생전에 온갖 거지들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살기등등해 사뭇 고압적이던 일본사람들을 무참히 농락하고 골탕을 먹였으며, 미국 선교사들과 불편 없는 대화를 나눌 만큼 영어실력이 뛰어나 한국인 환자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의료선교사를 단단히 혼을 내 주기도 했다.
세속적으로는 술잔의 풍류를 알았고, 기생들과도 친하며 창(唱)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기녀들의 은비녀와 금가락지를 거두어 만주 벌판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서문교회'에 부임한 김인전 목사(전주 3.1운동 총지휘,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자 중국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활동)는 양반사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주 전주향교를 방문해 그들과 먼저 친교를 유지하고자 한문, 한시, 경전에 대해 담화를 나누었다. 유림들은 그의 해박한 학문에 경탄하고 기독교 목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면서 '선생님' 또는 '목사님'으로 깍듯이 존경을 표했다. 이거두리는 김인전 목사가 외출 할 때는 선듯 앞장서서 신명나게 '쉬잇, 김 목사님 나가신다. 에라 비켜라'를 연발하면서 마치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 때와 같이 시윗소리를 외쳤다.
이거두리는 살림이 넉넉한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서자 아닌 서자 취급을 받아 정식 족보에 오르지 못했으나, 당시 사회의 부당한 틀을 깨고 나와 자유인으로 살면서 때로는 40~50명의 걸인들을 이끌고 시내를 누비면서 뜨끈뜨끈한 콩나물국밥을 사 먹이는가 하면 잔칫집에 가서는 이들을 포식시켜주면서 기생들을 불러다 세워놓고 걸인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는 해학과 기행을 행하였다.
이거두리의 전설은 많이 남아있으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의 자료가 별로 없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작고하신 작촌 조병희 선생이 '이보한'과 관계된 사적을 엮어 발표했고, 전영래 선생이 도내 일간지 '전라산천'의 연재에서 '거드렁팔자'란 제하의 글과 삽화를 현장 취재했으며, 중앙 일간지 등에 발표된 자료들을 모아 '임병해'님이 '이거두리 이야기'(에디아 96년10월5일 간행)를 간행하는 등 외부에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황성조기자

 

<비석 사진 설명>

이공거두리 애인여기비

이 비는 지난 날 완주군 상관면 죽림마을에 거두리 이보한의 아름다운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보고 삽화로 그린 전영래 선생의 '거드렁 팔자'의 글과 삽화의 비문 모형이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평생 성질이 온순하고 인자하였네.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주었네'라고 적혀있다.
이 간단한 내용은 지난날 완주군 상관면 죽림마을 거두리 이보한의 아름다운 자취를 기리기 위해 길가에 세운 비석에 나오는 비문이다.
이보한의 사랑의 손길로 구제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걸인들이 뜻을 모아 눈물의 성금으로 세운 빗돌이었다.
조잡한 석질에 치졸한 글씨로 새겨진 비석은 신작로 먼지로 부옇게 뒤덮여져 볼품이 없었으나, 전주부중에 서있는 비석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값진 비석이었다. 비록 높이는 넉자지만 당시 거두리 이보한의 아름다운 자취를 몇 줄의 글 내용에서 간단하게 밝혀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유물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조국 해방 무렵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뒷날 전주 노인 한 분인 조여진씨가 파편과 빗돌의 사진을 보여줘 비로소 파괴된 줄 알았다.
이에 비석의 파편마저도 찾지 못하고 있으나, 훗날 복원되길 기대한다. - 전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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