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방 3·1운동은 3월 5일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군산·익산·전주 등지로 확산되어갔다.
  진안군에는 3월초 만세시위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오기열(吳基烈, 농업)은 3월 6일 이성녀의 집에서 3·1운동 관련 문서 3통을 작성하여 진안면 마령면 평지리에 부착하는 등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리고 3월 25일 진안읍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5일 오전 수백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했으나, 일제 경찰과의 충돌 없이 자진해산 했다.
  또한 4월 3일 오후 4시경,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소재 화동학교 교정에서 생도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이를 목격한 김주한(金周漢, 노동)은 생도들에게 마을 주민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권유문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생도 양해관(梁海寬)이 권유문을 작성하여 김주한에게 전달, 김주한은 마을 사람들에게 권유문을 보여 주며 만세시위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밤 10시경 마을 주민 이기봉(李老奉)의 집 앞 논에서 주민들과 생도 6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김주한은 출동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아울러 4월 6일에는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 전영상, 김구영, 황해수 등의 주동으로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일제 경찰과 헌병의 진압으로 군중들은 자진해산했으며, 황해수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 도통리에서 전경원의 주동으로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다음 날에는 마령면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됐다.
  4월 13일 마령시장에서 오기열, 전영상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운동가 전개되었는데, 당시 마령시장과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은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전영상은 시장에서 일본인 경찰을 만나자 달려들어 그자가 찬 환도를 빼앗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령하니 일본인 경찰은 손을 들어 민중들과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서야 겨우 목숨을 구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전영상은 그 뒤 일경에 잡혀 강정리 주재소에 갇혔으나 주재소의 벽을 발로 차서 무너뜨리고 탈출했다.
  일경이 추격하자 강정리 뒷산으로 올라가 돌을 굴리며 ‘만일 죽고 싶은 놈은 올라 오너라’고 호령하며 일경의 접근을 막기도 했다.
  당시 임실에서 마령으로 넘어오던 동양척식회사 김제출장소 직원 온상영은 시위대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오기열·전영상·황해수·전보익 등이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 외에도 주양리 만세시위로부터 독립활동에 투신하여 주민을 만세의 대열로 이끈 김영필는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대한민보, 독립신문, 독립선언서 등을 입수하여 각 지역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배포했다.
  이 문서는 장수와 무주에까지 전달되었으며, 김영필은 풍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까지 잠입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었다.
  김영필(金永弼, 농업)은 일본 동경에 채류 중 1919년 4월 25일부터 1920년 3월 7일 사이에 5차례에 걸쳐 무주군 무주면 용포리 송병두 앞으로 서신을 보내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는 1919년 5월 17일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송하는 한편 1920년 4월 25일 송병두에게 각지에 독립운동 기사를 게재한 대한민보·독립신문을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20년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됐으며, 그는 결국 대구 복심법원에서 4년간 복역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전영상全永祥 1895. 9. 15 ~ 1958. 9. 13
  전라북도 진안(鎭安) 출신으로, 자는 보익, 호는 운암이다.
  1919년 4월 6일 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효심도 지극하여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했다.

오기열吳基烈 1888. 3. 9~1950. 9.28
  자는 낙중洛中, 호는 둔암遯菴으로, 진안 마령면 평지리 원평리에서 1868년 3월 9일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며, 6.25사변을 맞아 북괴에 붙들려 1951년 8월 16일 학살당했다.

황해수黃海水 1894.2.5. ~ 1948. 8. 1
  임실출신으로, 3.1만세운동의 선봉이었다. 1919년 4월 6일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吳基烈·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泳 등과 주동하여 인근 주민 수 백 명이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헌병의 출동으로 제지당하였는데 이때 황해수는 적에게 끌려가면서도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라고 격려하였으며, 늠름한 기색을 보여서 일반을 크게 격려하였다.

김구영 金龜泳 1884 ~ 1931
  자는 락서洛書, 호는 정사睛沙 본관은 연안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 저녁으로 혼정신성 昏定晨省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1910년부터 망국의 한을 품어 오던 중 1919년 기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전영상, 오기열 등과 함께 군중을 모아 진안 마령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때 전영상이 왜병에게 붙잡혀 마령 강정리 주재소에 있을 때 그곳을 습격하여 그를 구출해 왔다. 그 후 지방의 유림들과 더불어 진안 마이산에 이산사를 창건하는데 공헌했다.

김주한(金周漢) 1882. 1. 5 ~ 1959. 8. 5
  전라북도 금산(錦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鎭安郡朱川面朱陽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주양리에 있는 화동학교(華東學校) 학생인 양해관(梁海寬) 등에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권유하고, 이날 오후 4시경 화동학교 교정에서 학생·주민들을 지휘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일단 자진 해산하였다. 이날 밤 10시경 다시 학생·주민을 선동하여, 이노봉(李老奉)의 집 앞 논에서 6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영필(金永弼) 1896.3.16 ~ 1976.9.3
  호는 달중(達中),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1896년 3월 16일 진안 주천에서 태어났다.
  12살에는 화동학교에서 수학을 한뒤 이곳의 교사가 되어 한일합방의 통한을 달래면서 후학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면서 개화운동에서 앞장섰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선생은 대한민보(大韓民報),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독립선언문을 무주, 진안, 장수 일원에 뿌리면서 3.1만세 운동을 지휘하였다. 그해 4월 3일 선생은 주천면 유지 김주한(金周漢)과 학생 양해관(梁海寬)과 뜻을 모아 새벽 4시께 학생과 주민 2백여명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그러나 곧 들이닥친 일경에 의해 대열은 일단 해산됐으나 밤 10시께 60여명이 마을 앞 논에 다시 모여 횃불을 손에 들고 독립만세을 외쳤다. 주양리에서 터진 만세운동은 진안, 마령, 성수 등으로 번지면서 항일구구 운동의 염원을 불태우게 되었다.

송필용 宋弼用 1904~1951
  자는 윤직(允直), 호는 경헌(敬軒),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904년 6월 22일 주천면 신양리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6살 때인 1919년 사립화동학교(華東學校)에 다니던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이 진안 땅에 까지 불타오르자 학생들과 같이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횃불을 들고 학교 앞에 논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송필용은 결국 왜경에 잡혀 옥살이까지 하였다.

전성권 全聖權 1887~1938
  자는 경언敬彦, 본관은 천안天安으로, 문평공文平公 도은都隱 전문식全文軾의 후손이며, 전영탁全永鐸의 아들이다. 1919년 수십명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고 진압하는 왜경들의 총칼에도 굽히지 않고 다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수년간 복역했다.

 
진안의 현충시설
  국가보훈처에서는 국가유공자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조형물·사적지 등 국민의 애국심을 기르는 데에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있다.
  현충시설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시설과 6·25전쟁 등의 국가수호활동과 관련된 시설로 나뉜다. 현재 전국에 현충시설은 2,144개소가 있는데, 독립운동 시설은 925개소이다.
  현재 진안지역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곳은 총 8개소이다.
 
  - 이재명 의사 동상
  - 호남창의동맹단 의병 위령비
  - 독립유공자 추모탑
· 현충시설관리번호 52-1-10, 진안 마령면 동촌리 77-3
  독립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진안의 독립유공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 둔암 오기열 기적비
  · 현충시설관리번호 52-1-12, 진안 마령면 평지리 1137-9
  · 독립운동가 오기열을 기리는 비이다

  - 전영상선생 기적비
  · 현충시설관리번호 52-1-13, 진안 마령면 계서리 1313-1
  · 독립운동가 전영상을 기리는 비이다.

  - 유관순 상
  · 현충시설관리번호 52-1-14, 진안 백운면 백암리 537 백운초등학교 내
  · 독립운동가 유관순을 기리는 동상이다. 1983년 진안 백운면 부녀회에서 유관순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대한이산묘
  - 내산사

양대진 기자  djyang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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