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인의 애국열사 ‘맹활약’ 만세소리 드높이다

<12. 장수 3·1운동사>박정주·정봉수 등 선봉 주민 규합 독립만세운동 3·19 '산서장터' 포문 뒤 ‘번암장터’ 함성 최고조 엄정규 기자l승인2019.06.12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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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 산서면 동화리는 기미년 당시 박정주, 정봉수 열사를 중심으로 15명의 애국 열사들이 지역주민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이에 장수군은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동화리 괴정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 해오고 있다.

특히 장수군은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인 백용성 조사의 출생지로 전국 어느 곳보다 독립만세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곳으로, 장수군은 백용성 조사를 비롯해 박춘실, 전해산, 정인승 등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호국의 성지이다.

- 장수군 최초 만세 시위지 ‘산서장터’, 함성의 최고조 ‘번암장터’
▲1919년 3월 5일, 계획됐던 ‘대한독립만세 운동’은 장수읍에 결국 울려 퍼지지 못했다.
독립선언문이 전달된 2일 천도교 교구는 5일 장수읍 장날을 기해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거행하기로 계획했지만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분견대가 인력을 총동원해 철통같은 감시를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가 아닌 도약이었다. ‘대한독립 만세’운동은 장수군 지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고 3월 19일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朴政株)의 주동으로 최초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터에 모인 장꾼과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태극기 등을 배포하며 주민을 선도해 독립만세시위 운동을 주동하던 박정주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군중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박정주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에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더욱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사흘 뒤인 3월 22일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시장 일대에서도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뜨겁게 울려 퍼졌다.

번암면 죽림리에 거주하고 있던 임실 출신 박준수(朴俊洙)는 같은 마을 이공일(李工一), 이종대(李鍾大) 등과 함께 장날을 맞아 남원과 운봉 등지에서 모여든 장꾼과 군중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인근 남녀노소들의 목소리까지 합쳐져 시위운동은 확대됐다. 시위운동을 사전 계획한 박준수 등은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5명의 애국 열사들이 지역주민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장수군 산서면은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동화리 괴정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곳에서 매년 3.1절을 기념해 ‘대한독립만세 운동’ 재현 등 기념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 산서면 동화리 괴정마을 ‘3.1운동 기념비’
▲국운의 불행으로 왜구의 침략을 당해 국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잔악한 폭정이 민생을 힘들게 해 국민이 다 뜻을 모아 마침내 기미의거를 분발해 만국의 이목을 경동하니 실로 천고의 장렬함이다.

장수군 산서면에도 애국지사 15인이 있으니 박정주(朴政柱), 정봉수(丁奉洙), 정호현(丁豪鉉), 김형택(金炯澤), 이화백(李化伯), 이길동(李吉童), 이상욱(李相煜), 유동렬(柳東烈), 이상일(李相一), 이규섭(李圭燮), 장화삼(張華三), 정대화(丁大和), 육상룡(陸相龍), 권봉옥(權奉玉), 이종호(李鐘昊)가 본부에 연락하고 각 부락을 선동했다.

이들은 산서장날에 수백 인을 규합해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일본경찰의 총압(銃壓)으로 부상자가 많이 나자 군중이 해산되고 15인이 주모자로 대구감옥에 체수(逮囚)되어 6개월부터 1년6개월까지 형을 받아 복역했다.

애국지사들을 심문함에 박정주가 높은 소리로 꾸짖어 이르되 “백주(白晝)에 도적이 우리 집에 들어 물건을 약취한 즉 누가 큰 소리로 꾸짖고 축출치 않으리?” 왜관이 말이 막혀 다시 묻지 아니하고 감옥에 투입해 고형을 받아 수년 후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광복된 후 38년이 되었으나 이와 같은 의행이 요료(??)함을 본 면 제위께서 걱정하여 1983년 경로당 앞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1996년 군의 지원으로 괴정마을 앞으로 이건했다.

- 장수에서 태어나 자란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 백용성 조사
▲백용성(白龍城,1864~1940)의 본관은 수원으로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당시 한용운과 함께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백용성 조사는 일본경찰에 붙잡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3월에 출옥했지만 늘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는 1985년 백용성 조사의 생가와 주변 토지를 매입해 국비 및 지방비, 후원금 등을 모아 생가를 복원하는 등 성역화작업을 시행했다.

-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영웅 박춘실, 전해산, 정인승
▲박춘실(朴春實1875~1914)
지금의 장수군 계북면 임평리(당시 백암리)에서 태어난 박춘실의 원래 이름은 동식이고 춘실은 호다.

박춘실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다음해 4월 최익현의 순창 거의에 참가했다. 최익현 등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자 박춘실은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을 끌어 모아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 무기를 확보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1907년 9월 중순, 계북면 양악마을에서 문태서(文泰瑞)를 만나 함께 구국을 위한 항전을 맹세하고 덕유산을 거점으로 경남북, 전북 등을 무대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박춘실은 왜적과 60여 회 교전과 습격으로 수백의 적병을 노획했다. 박춘실은 1909년 5월 계북면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이다 체포돼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전주감옥에서 복역 중 탈옥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으며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에는 옥벽을 파괴하고 100여명의 동지들을 탈옥시킨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전해산 (全海山,1878~1910)
임실군 둔남면(현 오수면) 국화촌에서 태어난 전해산의 본명은 기홍(基洪)이다. 전해산이 장수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6살 때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로 이사하면서부터다.

전해산은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6년 6월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고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8월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전해산은 이석용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의논했다.

이때 기삼연이 전라남도 영광에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이석용과 더불어 종사가 됐다.

전해산은 이석용이 결성한 의병창의동맹의 참모에 기용돼 조경환의 의병군에 가담해 싸우다가 조경환이 전사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전투를 지휘하게 됐다.

경성결사대의 간부였던 정원집이 유배지에서 탈출하자 그를 선봉장으로 삼아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조직하고, 광주, 장성, 함평, 영광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전해산은 1910년 일본군이 부모를 잡아가자 자수했으며 사형됐다. 시신은 가족에 의해 수습돼 대론리 앞산에 안정됐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인승(鄭寅承,1897~1986)
장수에서 출생한 정인승은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25년 4월부터 8월까지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35년 서울로 올라온 뒤 최현배를 만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이사가 되면서 1935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큰사전](전6권)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했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일제가 한국어의 보급과 한글로 된 출판물의 출간을 금지하는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함경남도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정인승은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인정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장수=엄정규기자?cock27@


엄정규 기자  crazycock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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