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군 3.1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순사보의 열정과 줄포공립학교 학생 의거이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부안군의 천도교인들은 이웃 고을인 정읍군(井邑郡)의 천도교측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해가며 거사를 계획했다.
그리고 3월 중순경부터는 예수교측 및 일반 청년층과도 자주 만나서 부안군의 독립만세운동을 기도했는데 25일경부터는 운동계획이 실천단계로 들어가게 됐다.
부안군내의 청년 중에서도 동진면(東津面)의 은희송(殷熙松)은 특별히 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원래 적측의 순사보(巡査補)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각처에서 3?1 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자기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뜻을 고쳐 독립운동에 힘을 바칠 것을 결정했다.
은희송은 병을 청탁하고 순사보의 직을 사면함과 함께 병을 치료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군내 및 정읍군 등지로 다니면서 은희상(殷熙相) 등 동지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또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3월 26일경부터는 천도교 및 예수교측의 인사들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3월 30일(음 2월 29일)의 부안읍 장날을 기해 일제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따라서 예수교측에서는 전도 교인들을 통해 전도 행각을 가장하고 각면 각동을 순회하면서 만세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며 은희송 등 청년들은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해 각동에 배부하고 천도교측에서는 백산(白山)?상서(上西)면 등 지방의 동원을 담당했다.
그러나 계획이 미리 적측에 눈치 채게 됐으며 적측의 경계가 삼엄했기 때문에 운동의 전개는 여의하지 않았는데 3월 30일 오후 8시경에는 드디어 부안읍 뒷산에서 신호하는 봉화에 따라 독립만세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봉화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아가고 번져 감에 따라 만세함성도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차례차례 울려 나오게 됐다.
횃불 혹은 등불의 행진과 함께 만세의 대열은 넘쳐흐르고 한데로 모이기도 했다.
또 이러한 만세운동은 각 부락에서 계속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며 많은 관계자 중 미산선(米刪瑄)?임창무(任昌茂) 등은 1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루기도 했다.
뒤이어 4월 18일(음 3월 18일)에는 줄포면(茁浦面) 줄포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줄포에서는 공립보통학교 3?4학년 생도들에 의해 벌서 4월 7?8일경에도 학교 교정에서 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주동 생도 김태순(金泰順)?박기봉(朴基鳳)?김동섭(金東燮) 등이 18일의 줄포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크게 펼칠 것을 계획했다.
이들 생도들은 많은 태극기를 비밀리에 제조했으며 18일 이른 아침에는 보안면(保安面) 면사무소 게시판과 큰길가 소나무에 달기도 하고 학교로 비밀히 가져다 생도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동안에는 학교에서 훈도에게 발견돼 주의를 받은 일도 있었지만 생도들은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오전 11시경 수업시간이 끝난 다음 교문을 나가 시장으로 집합했다.
그리고 일부의 생도들은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돌려주며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리부터 경계를 펴고 있던 줄포경찰서 순사들에 의해 제지되고 주동 학생 중 4학년생 김태순?김동섭?서용순(徐龍順)?이병근(李秉根)?박병섭(朴炳燮)?이병갑(李炳甲) 등은 체포됐다가 학교장 및 학부형의 책임 하에 석방됐다.
그러나 그날 밤 10시경에는 또 인근 부락에서 횃불 혹은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해 적측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으며 10여 명이 검속을 당하기도 했다.
/부안=최규현기자

 

줄포공립학교 일장기 사진 출처는 부안 정재철씨 제공
서류사진은 3.1운동 관련 조선총독부 비밀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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