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가 임실에 전달 되기까지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전주를 거쳐 임실에 도착한 것은 3월 2일이었다. 독립선언서 전달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은 충청도ㆍ전라도 지역 배포자인 인종익(印宗益)에게 2,500매를 주어 배포하도록 하였다.

2월 28일 오전 11시 남대문발 남행 혼합열차를 타고 대전에 이르러 그곳에서 호남선 연결상의 형편으로 1박을 하고, 3월 1일 오전 6시 대전발 호남선 제1번차를 타고 익산을 거쳐 다시 전주행 경편철도를 갈아타고 12시경 전주에 도착한다. 인종익은 고사동에 있던 천도교 전주교구로 가서 김진옥에게 독립선언서 1,800매를 전달하였고, 김진옥은 독립선언서 200매를 휴대하고 천도교 임실교구 한영태(韓榮泰) 교구장에서 전달하여 3월 2일 밤중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당시 천도교 임실교구는 청웅면 양지에서 1916년 임실읍 성가리로 이전한 상태였다.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임실지역 천도교

전라북도 천도교 대표들은 임실지역 천도교 인사들과 전주시 노송동 이군필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가졌으며, 2월 27일 운암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최승우, 김영원, 한영태 등이 3.1독립운동 거사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봉화책, 선언서책, 동원연락책 등을 구분하여 각자 역할을 나누었고, 3월 1일 봉화를 신호로 3월 2일 일제히 각 면 소재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봉화를 올렸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3월 2일 천도교 임실교구장 한영태는 전주교구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강계대(姜啓大), 박판덕(朴判德), 우성오(禹成五), 황성진(黃成?), 김영원(金榮遠), 박성근(朴成根) 등 천도교 신자을 통해 임실 각지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당시 독립선언서 20여 매를 전달받았던 운암은 입석리, 선거리, 학산리 일대에 게시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민들에게 전하였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일 만세운동은 곧바로 일경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으나 이후 임실지역에서 6개월간 지속적인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임실지역 3.1 만세운동은 천도교 조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족대표 박준승

박준승은 선생은 1897년 동학에 입교한다. 물론 그의 스승 삼혁당(三革堂) 김영원(金榮遠, 1851∼1919) 선생의 지도와 권유가 있었겠지만, 당시 26세이던 1890년 동학에 입교하였다.[천도교회월보 199호] 그 이후 선생은 41세 때인 1906년 청웅면 향교리에 설치된 임실 제2교구장을 맡았고, 43세 때인 1908년에 수접주(首接主)가 되었는데, 당시 정읍, 고창지역 천도교구의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이 즈음 정읍으로 이주하였다. 1912년 천도교 전라남도 장성 대교구장, 천도교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 1916년 천도교 전라도 도사를 엮임 하였다.

1919년 당시 54세였던 박준승은 2월 24일 고종황제 국장(國葬)을 참관하기 위해 상경하였고,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권병덕)?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므로 나는 본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 만큼 찬성하였다’[박준승 심문 자료]

 

담담한 어조로 이어졌을 일경의 심문에 대한 답변은 그만큼 조선 민족에게는 당연한 일이었 던 것이다.

 

임실지역 3.1 만세운동의 전개

3월 2일 운암지역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3월 12일 임실, 3월 10일 오수초등학교 초등학생 만세운동, 3월 15일 청웅, 3월 20일 지사, 3월 23일과 24일 오수 3.1만세운동 등 4월 초순까지 임실지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계속 이어졌고, 천도교 임실교구장 한영태(韓榮泰, 1878~1919)와 김영원(金榮遠, 1853~1919)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허박은 시위도 중 출동한 일경의 총탄에 의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옥사를 하였다. 현재 임실지역 3.1운동 관련 국가유공자는 76명이며, 이중 오수지역 3.1만세운동에 관련된 국가유공자만 44명에 이를 정도로 3월 23일과 24일 양일간에 펼쳐진 오수 3.1 만세운동은 그 어느 곳보다도 치열한 시위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이어서 설명하면 어떨까 싶다. /임실=임은두기자 · led111@

/ 자료제공=임실군청 김철배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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