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6일(음력 2월 15일) 태인. 장날인 이날 태인 전역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삼삼오오 짝을 지은 사람들이 조심조심 곳곳을 돌며 시장 상인과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건넸다. 그리고 몇몇의 청년들이 면사무소 인근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청년들은 발길을 시장 쪽으로 향하며 뜨겁고 간절하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호남지역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태인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청년들의 외침에 시장에 모였던 사람은 몰론 태인 전역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합류했다. 이즈음, 이보다 앞선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기민독립선언서 발표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번져가고 있었다.

이렇게 태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곧 정읍으로 펴졌고, 호남지역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특히 단순히 만세시위에 그치지 않고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수많은 의병과 애국지사를 배출한 고장이자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외세 없는 이 땅의 자주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의 성지인 정읍의 의연한 기개를 보여줬다.  

거사의 시작 그리고 10일 동안 이어진 뜨거운 함성
태인 청년 김현곤과 송수연, 박지선 등은 3.1독립만세운동 직전 고종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여기서 김성수와 송진우 등 전라도 출신 인사들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과 선언서 등을 미리 입수했다. 그리고 고향 사람인 송한용, 송진상, 오석흥, 송영근, 김진호, 유치도, 김순공, 송덕봉, 김진근, 백복산, 김용안, 최민식, 김부곤 등과 태인 장날을 기해 거사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사단법인 정읍역사문화연구소 김재영 이사장에 따르면 이렇게 준비된 거사는 면서기였던 김현곤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 천 장을 등사, 장사꾼들에게 나눠주면서 시작됐다. 청년지사들의 절규와 그들로부터 태극기를 받아든 사람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단 번에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일본 군경의 총칼 위협과 무자비한 폭행도 노도처럼 일어난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고, 대부분의 상점과 노점이 문을 닫았다.

만세운동은 10일 동안 이어졌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다. 태인을 중심으로 주위 사방 산마루에 횃불을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횃불시위를 신호로 민가에서도 같은 시각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일본에 대한 항쟁을 이어갔다. 당시 80여명이 검속됐고 투옥된 애국지사들은 6월 또는 1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주도 인물 가운데 특히 송한용은 10개월 복역 후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애족장을 받았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송영근((1992년 대통령 표창)은 태인 출신의 인기가수 송대관의 조부로, 매년 열리는 태인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에 참석, 지역민들과 함께 조부를 비롯한 당시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매년 울려 퍼지는 뜨거웠던 그날의 만세소리!
매년 3월 1일이면 태인은 뜨거웠던 그날의 만세소리로 넘친다. 정읍시와 태인청년회의소가 매년 그날의 함성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행사를 가져오고 있다.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대의를 가슴깊이 새기고 선열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행사 때면 지역주민과 유족 등 민·관이 함께 선열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외쳤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외친다.
100주년인 올해는 여느 해보다 보다 뜻깊게 진행됐다. 3.1운동 기념탑 참배 후 1천여명의 참석자 모두가 태극기를 손에 들고 태인 저잣거리를 시가행진한 후 100년 전 대한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특히 전북과학대 학생들이 참여한 3막극이 태인 초등학교와 태인터미널, 장터사거리에서 진행돼 ‘그날의 함성’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케 했다. 8월에는  '태인 3.1운동'과 정읍지역이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이었음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도 가질 계획이다./정읍=정성우기자

 

미니 인터뷰 / 유진섭 시장
- “정읍은 항일독립운동의 중심...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최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은 광복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을 빌려 정읍이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임을 강조했다. 또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을 중심으로 800여명이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에서 의병을 일으킨, 호남 최초 항일의병투쟁인 병오창의(1906년)도 소개했다.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백정기의사와 박준승, 김양수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한 항일 민족운동의 고장임을 거듭 밝혔다. 98명이 애국장이나 대통령 표창 등으로 국가보훈처에 등록돼 있을 만큼 정읍의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국내·외 항일독립운동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지고 있는 보천교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도 언급했다. 관련해 김구 선생은 광복 후 보천교 본소 방문 당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자료에 따르면 보천교는 현재 화폐 기준으로 약 500여억원의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유 시장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들은 이름난 독립투사들뿐만 아니라 이름도, 대가도 없이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수많은 사람들 모두”라며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와 관련 시는 올해부터 호국보훈수당을 6만원에서 8만원으로 올렸고 지급 대상도 확대 (국가보훈처 지급대상에도 지급)하는 등 호국보훈 선양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유 시장은 “앞으로도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예우 마련과 유족의 영예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 사업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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