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금리는 옥정호라고 하는 1급수의 호수가 산 정상에 생김으로 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 마을은 이미 오래 전 의녀로서 이름을 떨친 대장금이 살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장금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혼자 가는 길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홀로 두고 궁궐로 들어가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동안 동무들과 함께 오르내리던 장금산이며 마을 앞 맑은 냇가, 봄부터 가을까지 피어나던 나물이며 장금이가 손수 채취하던 약초들이 모두 인사를 하는 듯하다.
재 너머 순창 설대감 마을에서 틈틈이 약에 쓰이는 약초들을 배우고, 약을 달이고 술을 담그는 방법을 배워 둔 것이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얼마 전 같은 마을에 살던 홍침이 의원이 되어 궁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장금이는 속으로 그저 부러운 마음뿐이었다. 비록 의원의 신분이라고는 하지만 궁궐에서 생활게 되며 얼마나 행복할까, 궁궐은 얼마나 으리으리하고 호사스러울지는 장금이는 그저 머릿속에서만 상상해 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상이 이제 장금이에게도 현실이 되는 참이었다. 장금이 뿐만 아니라 마을의 몇 몇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들도 함께 궁궐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마을 홍참봉 어른신의
전갈이었다.
더구나 장금이가 궁에 들어가면 임금님의 수라를 챙기고 홍침과 함께 임금님의 건강상태를 아침, 저녁으로 살피는 일을 도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장금이가 마을에서 사람들의 병을 잘 낫게 한다고 소문이 나기는 했지만 임금님의 수라와 건강에 관한 일을 맡는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장금이는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순창의 설대감댁이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하였지만 장금이의 마음은 무거울 따름이었다.
“장금아, 이 에미가 매일 아침 정화수를 떠놓고 장금산 산신령님께 네가 무사하기를 빌 터이니 아무 걱정말고 열심히 나라님 잘 살펴 드리거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홍침이와 잘 의논하고...”
장금이를 끌어안고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는 어머니도 목이 메인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을 받으며 장금이는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저만치 앞서가는 홍침을 따라 마을을 내려갔다. 멀리로 항상 오르내리던 장금산이 눈물에 가려 흐릿하게 보인다.

홍침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는 장금이

옥같이 푸른 옥정호수를 둘러싸고 대장금 마실길이 펼쳐져 있는 장금리는 의원 홍침과 내의녀 장금이가 살았던 마을이다. 홍침은 당시 조정을 쥐락펴락 하며 권세를 누리던 유자광의 먼 인척관계였다.
서얼 출신인 유자광은 본댁에서는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의 고모가 살았던 정읍 옹동과 산내 장금 마을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어려서부터 장금마을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던 유자광은 본인이 궁에서 임금의 수라간과 가무예술을 담당하는 사옹관과 장악원정이란 직위를 맡게 되었을때 장금마을의 사람들을 궁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장금리는 첩첩산중으로서 온갖 희귀한 약초들이 많이 자라는 지역이었고 장금마을 사람들이 일찍부터 재 너머 순창 설대감 마을과 왕래를 하면서 의술을 익혀왔다는 사실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런 연유로 유자광은 자신의 인척관계인 홍씨 집안의 홍침을 궁중으로 불러들이면서 같은 마을의 장금이를 비롯한 몇몇의 여자아이들을 함께 데려가게 된 것이었다.
유자광의 이같은 배려하에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 눈썰미가 뛰어나고 용모도 예뼜던 장금이가 임금의 수라간과 건강을 점검하는 내의녀 역할까지 도맡게 되었다.
장금이가 의술을 배운 설대감댁은 예로부터 의술로 이름을 떨친 집안이었는데 설경성이란 의원은 고려시대 유명한 어의로서 충렬왕의 병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에게 불려가 그의 병을 완치시킴으로써 세조의 시의가 되었고 벼슬까지 하고 내려온 명의로 소문이 자자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집을 설대감댁이라 불렀다. 그는 또한 바둑에도 능하여 세조와 가끔 바둑을 두었는데 쿠빌라이는 그를 일컬어 의술에는 성인이요 바둑에는 신선이라는 의미로 의성기선(醫聖棋仙)이라 칭하였다 한다.
이후 장금이는 입궁한 후 대장금이란 드라마에서 보았듯이 임금의 병환을 직접 살피고 치료하는 일약 스타 어의(御醫)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중종실록에 보면 홍침과 장금이가 임금이나 대비의 병환을 치료하거나 상을 받았다는 기록들이 전해진다.

중종 17년(1522) 9월 5일
대비전(大妃殿)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 ?콩 각 10석씩을 주고, 하사가 있었다.”
중종 19년(1524) 12월 15일(을사)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중종 39년(1544) 1월 29일,
“내가 저번에 감기가 들어 해수증(咳嗽症: 기침)을 얻어서 오래 시사(視事)하지 못하였다.
조금 나아서 경연(經筵: 군주에게 유교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자리)을 열었더니, 그 날
마침 추워서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의원 박세거(朴世擧)와 홍침(洪沈) 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과 은비(銀非) 등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이미 하유(下諭)하였거니와, 이 뜻을 내의원 제조에게 이르라“.

심마니들에게 잘 알려진 장금리

대장금이란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게 된 장금리와 그 주변 풍광들은 드라마 방영 이전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아주 유서 깊은 내력을 가진 곳이었다. 장금리가 장금리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장금이 어의로서 이름을 크게 떨치고 난 후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장금이가 장금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장금이의 본명대신 편의상 장금마을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 장금이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이야 자동차를 타면 정읍에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불과하지만 과거에는 구절재라고 하는 험준한 고개를 걸어서 힘들게 넘어야 했기 때문에 장금리는 말 그대로 첩첩산중의 적막한 산중마을일 뿐이었던 것이다. 산이 깊은 까닭에 각종 약초가 자생하고 있어 심마니들이나 약초꾼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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