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6월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를 침공한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는 바다에서,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대는 육지에서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백제는 바다의 전략적 요충지인 기벌포로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를 막지 못했고 신라군의 진격을 방어하기 좋은 육지 요충지인 탄현에서도 신라군을 방어하는데 실패했다. 충신 계백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맞섰지만 결국 이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지 못하고 전사했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왕자 태에게 맡긴 채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지만 사비성이 함락당한 후 웅진성에서 항복을 했다. 이때가 서기 660년 7월 18일. 서기전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된 백제가 31왕 678년 만에 멸망했다.
그러나 항복 이후 나당연합군의 횡포와 약탈에 시달린 백제 유민들은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부흥군의 중심지를 주류성(周留城)으로 옮겼다. 이후 661년 9월 일본(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豊)이 귀국하면서 왕으로 옹립, 부흥백제국이 성립되었다. 부흥백제국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 옛 지역을 많이 회복했다. 한때 당이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포위하여 나당 연합군을 긴장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권력을 둘러싸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복신을 살해하면서 부흥백제국의 힘이 약해진다. 이런 부흥백제국의 혼란을 틈타 나당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이에 일본에서 건너 온 풍왕은 원조를 요청하고 일본은 1000척의 병선에 2만7000명의 군대를 파견한다. 하지만 일본은 백강에서 당나라 수군에게 병선 400척을 잃는 대패를 당하고 풍왕도 고구려도 달아난다. 결국 주류성은 항복하기에 이르렀으며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주류성에서의 패배는 사실상 백제부흥운동의 종식을 의미한다.
주류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이었지만 오랫동안 정확한 위치를 비정(근거에 의해 추정하다)하지 못했다. 그동안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唐山城), 충남 홍성의 홍주성, 그리고 부안군 상서면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이 주류성으로 알려졌다.
건지산성은 두계 이병도가 지지하여 학계 통설이 된 바 있지만 발굴 결과 고려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밝혀졌다. 주류성의 다른 표기로 간주되던 ‘두릉윤성’ 혹은 ‘두량윤성’이 연기군 당산성으로 추정되기도 했지만 <삼국사기> 문무왕 3년조에 신라가 공격한 성으로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나란히 거론돼 있어 두 성이 별개의 성임이 분명해졌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기한 홍주성은 주변에 농지가 제법 형성돼 있어 <일본서기>에서 묘사한 주류성과 큰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토대로 주류성의 입지를 살펴보면 ‘백강에서 가깝고 산이 험준하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천험의 요새지만 농토에서 멀리 떨어진 척박한 토양으로서 전쟁이 길어지면 식량 수급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이다.
특히 663년 나당연합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백강의 위치를 추정해본다면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백제본기>에는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 및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유인궤와 부영융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을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가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강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이 바로 주류성이라는 이야기다.
서천 ‘건지산성’의 경우 웅진강과 백강을 별개의 강이 아닌 같은 강줄기로 간주하고 있다. 웅진강과 백강을 공주와 부여 근방을 통과하는 금강 이름으로 각각 간주하면서 금강 주변에 주류성이 소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는 백강구와 웅진강구, 그리고 기벌포를 동일한 곳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백제 멸망기의 기록에서 웅진강 혹은 웅진하로 일컬었던 금강을 백강으로 호칭한 예가 없었다면서 두 강은 서로 다른 별개의 강으로 보는 게 순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주류성을 부안지역으로 비정한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부를 평왜현(平倭縣)이라고 불렀던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문자 그대로 왜군을 평정했다는 의미다. 백강전투와 관련지어 연원을 살필 수 있으며 주류성이 평왜현 근처임이 마땅하다고 밝히고 있다. 663년 웅진강은 금강으로, 백강은 동진강으로 비정하는 이유다.
이런 조건에 따라 현재는 부안군 행안면 감교리 우금산성(禹金山城)이 주류성으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동진강이 가까이 있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산성이 우금산성이기 때문이다.
우금산성은 지난 1974년 전라북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開巖寺)뒷산이다. 돌로 쌓은 성으로 총길이가 3,960m에 이른다. 우금바위에서 개암사 저수지까지의 능선밑으로 다듬은 돌과 자연석으로 이뤄졌다. 개암사 뒷뽁으로 20~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넓은 동굴이 있는 커다란 우금바위가 나온다. 20평에 가까운 넓은 동굴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장군의 지휘소로 였다는 이야기에 따라 복신굴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또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기도 한다.

▲우금산성 이야기
<영조실록>에 의하면 1727년(영조 3)에 부안과 변산지역에 도적떼가 할거하면서 대낮에도 장막을 치고 노략질을 하였는데, 변산에 있는 큰 절을 습격하여 승려들을 내쫓고 점거하기도 하였다. 변산에 소재한 큰 절은 개암사 아니면 내소사인데, 여하튼 이들 도작때의 영채는 개암사뒷산에 자리잡은 위금암산성이 분명하다. 호남지역에 유민으로 된 도적떼의 영채는 월출산과 변산에 각각 소재하였다.

▲개암사(開巖寺)
백제무왕 35년(634년)에 묘련대사가 창건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다. 아름다운 전나무 길로 유명한 내소사와 함께 부안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보물 제292호인 대웅보전, 보물 제1269호인 영산회괘불탱을 볼 수 있다.
대웅보전은 묘련 스님이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인조 14년(1636년)계호 스님이 다시 지었다. 규모에 비해 우람한 기둥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준 건물로 곳곳에 용의 머리와 봉황을 새겼으며 처마 밑에는 화려한 연꽃을 조각했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 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 등에 따라 맞는 것을 봉안한다. 조선 영조 25년(1749년)에 의겸과 영안 두 스님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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