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당시 과학이 예술로 표현된 직접적인 사례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오르면 당대의 과학과 권력이 총동원돼 위대한 건축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는 소위 '황금비율'이라는 기하학과 도리아식으로 불리는 예술양식이 적용됐으며 또한 무굴제국 최고의 걸작중 하나 ‘궁전의 왕관‘이란 뜻을 가진 ‘타지마할 묘’역시 20여년의 시간과 2만여명의 기술자가 동원돼 과학과 예술이 적용됐다. 이러한 세계적인 건축물과 견줄 만한 것이 우리지역에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익산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백제시대 미륵사지석탑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2017년 7월.
“깡~깡~깡~”
백제 무왕시대(600~641년)중 637년 미륵삼존의 출현을 기념해 건립된 미륵사지 석탑이 1380년 후인 후손들에 의해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1962년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 14.2m의 우리나라 최초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석탑의 외부에 노출된 부재만 580여개이고, 내부의 돌까지 합치면 약 2800개에 달한다.
미륵사지석탑은 목탑에서 기본적인 구조를 본떴다. 우선 기단부를 목탑의 기단과 같은 단층기단으로 삼고 1층탑신 네 곳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십자형의 공간을 마련했다. 탑신의 기둥은 위쪽은 좁고 아래쪽은 넓게 하여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기둥 위에는 창방(목조건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가로재)이라는 목조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구조물을 가로질렀고 그 위에 3단의 층급으로 지붕을 받들게 했다.
미륵사지석탑의 창안자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아마도 이 3단의 층급받침이었을 것이다.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3단의 층급받침은 목조 건축의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부분)에 해당된다. 공포 부분은 목조 건축에서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해 기하학적으로 힘을 배분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이 부분을 돌로 조성할 경우 사실적인 표현을 얻기란 매우 힘들다. 그런데 미륵사지 석탑은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마치 목조 건축의 공포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훌륭하게 이를 처리했다. 이후 석탑에서 보이는 층급받침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석탑에 응용됐다. 당시 미륵사지석탑의 장인은 분명 목조 건축에 능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는 비례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시각적 원리와 미의식에도 능통했음이 틀림없다.
문화인류학에서 어떠한 사물이나 문명이 탄생하였을 때 그것은 발생기 - 발전기 - 성숙기 - 쇠퇴기의 과정을 거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석탑 문화는 발생기와 발전기 없이 곧장 최고조의 성숙기로 발전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말하자면 바로 성숙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백제인의 뛰어난 과학과 이성 때문에 가능했다. 백제인은 미륵사지석탑을 낳았고, 석탑 문화의 발생기에 태어난 미륵사지석탑은 이미 우리나라 탑파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명품이었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에는 목탑이, 동원과 서원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최근 발굴에서 목탑터는 한 변의 길이가 약 18.5m로 추정되었는데 석탑의 기단 길이가 10.4m임을 감안할 때 목탑의 높이는 약 2배인 40m의 탑으로 추측된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부분 발굴조사를 통해 초석과 기단, 4면에 부설된 계단석들이 확인됐다. 이를 근거로 이중기단에 평면형태, 상륜부를 포함한 높이 27.67m의 9층석탑으로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석탑은 근래까지 7층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발굴 조사 때 동탑지에서 노반석(탑 상층부에 쌓아진 돌)과 없어졌던 지붕돌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서탑과의 비례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계산하여 복원한 결과 9층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복원된 높이는 총 24m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경주 감은사지석탑이 13m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지석탑은 그 두배에 가까운 규모가 되는 셈이다.
미륵사 석탑의 최대 수난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어났다.
어느 누군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 민족을 지배하려면 역사를 먼저 지배하라”
당시 우리나라를 강제 침탈한 일제는 원만한 식민지 지배를 위해 우리 문화의 모든 것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의 저명 학자들이 총동원된 이 연구는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망라되었는데, 특히 일본 동경대학 공과대학 교수인 세키노 타다시는 전국의 불교 유적, 고분, 건축 등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중 고적 조사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한 발굴과 약탈을 자행해 당시 천황과 데라우치 총독에게 우리의 문화재를 진상하기도했다. 그의 조사로 인해 일제강점기의 우리 문화재는 전대미문의 수난을 겪게 된다.
특히 일제는 석조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명목 아래 여러 가지 변형을 가했는데 당시 최첨단 소재였던 시멘트가 복원의 주된 소재로 이용됐다. 경주의 석굴암도 이때 시멘트로 복원됐다고 알려져 있다. 1915년 세키노는 미륵사지석탑의 붕괴 위험을 지적하면서 석탑의 동쪽 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시멘트로 무자비하게 복원했다.
 그렇게 한 세기를 더 버텼지만, 1998년 구조안전진단에서 석탑의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문화재청은 2001년부터 석탑을 해체하고 다시 쌓아올리는 보수정비를 시작했으며 현재 4층 보수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예정대로라면 오는 11월 석탑의 보수정비가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석탑 보수정비를 진행 중인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오랜 세월이 지나 돌들이 부서지거나 조각 난 경우가 많다”며 “조각난 돌들을 일일이 구조보강해 복원에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석탑에 대한 기록이 없어 완벽한 고증은 어렵다”며 “현재 석탑 보수정비의 목표는 해체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최선”이라며 그 이유로 “세계유산 이며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이 과도하게 복원될 경우 현대의 새로운 조형물로 비난 받을 수 있으며 진정성-역사성에 훼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9층까지 복원할 경우 돌의 하중이 커질 수도 있다”고 말한 뒤 “보수정비 과정에서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 기존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석탑의 보수정비 완료 후 사용된 옛 돌이 62∼63%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일부 부재는 옛 돌과 새 돌을 정교하게 합쳐서 사용한다”며 “미륵사지석탑의 해체와 복원은 건축문화재의 수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별도 박스용
사리장엄 발견
2009년 1월14일 미륵사지 석탑 1층 해체조사를 진해하던 중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됐다. 사리공 주변에는 십자형 먹선과 석회로 밀봉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 안에 안치돼 있었는데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등 다양한 물품이 출토됐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역사와 불교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게 됐다.이로인해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출토는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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