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 결과 다양한 유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한 만큼 대부분 왕궁이나 사찰과 관련돼 있으며 그에 얽힌 이야기도 풍성하다.
  이는 왕궁리유적의 공간과 특성은 물론 백제의 생활상과 위상까지 말해줘 당시 익산과 백제를 읽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289호) 보수작업 중 발견된 일괄유물을 비롯해 금제품 및 유리제품, 수부명기와, 수막새, 도가니, 중국제 청자편, 전달린토기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중 일부는 2008년 왕궁리유적 남측에 건립된 왕궁리유적전시관에 보관 및 전시되고 있다.  
  그 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을 보수하기 위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며 백제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시기 것들로 판단된다.
  사리장엄구는 불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사용하는 용기, 공물, 공예품을 총칭하는 말로 왕궁리 5층석탑에서는 금동여래입상, 청동요령, 향류, 녹색의 유리사리병, 은제도금금강경판 등이 발견됐다.  
  유물들은 모두 2중으로 된 금동제 합안에 봉안돼 있었다. 내합과 유물들을 보호하기 위한 외합은 장식도 없고 칠도 벗겨져 있었다. 반면 녹색의 사리병이 들어 있던 내합과 금강경판이 들어있던 내합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도금 상태가 완전했다. 현재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금제품, 유리제품, 동제품도 있다. 금연주, 금고리, 금판, 금실, 금못, 금장식과 제련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인 용재(슬레그), 만드는 도구인 도가니 등 정제 전부터 완성품, 도구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됨에 따라 대단위의 금 제련, 정련뿐 아니라 귀금속 세공까지 이뤄진 공방지가 존재했음을 입증했다.
  금은 고대 가장 귀한 신분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던 물품이었으며, 무왕은 서동이 금을 얻어 백제 제30대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을 중요시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왕궁 내 생산시설을 두고 최고의 장인들을 불러 모았으며 금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다고 한다.   
  금은 순금보다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고 단단할 필요가 있는 제품일수록 합금 비율이 높다. 장식용 금제품은 순도가 높아 고대 금제품 제작기법 및 과정 연구에 귀중하게 쓰이고 있다.
  유리의 경우 제작기법상 몰딩기법(토제 진흙 틀에 부어 제작), 와인딩 기법(용융된 상태의 금속막대 주위에 감아 말아서 만듦), 드로잉 기법(금속막대에 묻은 유리를 막대가 감싸지도록 길게 잡아 늘려 유리관 상태로 만든 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만듦)으로 나뉘며 색상은 녹색, 옥색, 청색, 황색으로 다양하다. 
  여기서 확인된 유리 및 금속제품의 제작기술은 일본으로 전파돼 7,8세기 고대 종합공방유적인 아스카이케유적에서 꽃핀다. 오늘날 보석의 도시 익산에도 영향을 미쳤을 걸로 보인다.
  도가니는 고온에 녹인 광물을 받아내는 역할을 해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다. 바닥이 뾰족한 원추형 또는 절구모양이며 내벽에는 금 알갱이가 남아있다. 유리 제작용과 금속 제작용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금속 제작용은 금, 동, 청동용으로 세분해 용도별로 사용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 화장실에서는 기생충알과 화장지처럼 사용된 뒤처리용 막대기가 확인됐다. 이는 공방 관련 사람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당대 사람들의 식생활, 질병 상태를 알 수 있다.
  토광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발판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좁은 수로를 통해 석축배수로로 연결돼 화장실 내부 오수가 일정하게 차게 되면 수로로 배출하게 되는, 정화조 같은 과학적 구조를 하고 있다.
  기와도 여럿이다. 발굴조사과정에서 나온 기와편의 수는 30만점 정도. 왕궁이나 사찰건물, 담장 지붕에 사용했던 건데 막새기와와 함께 시대별로 만드는 흙과 제작방법, 무늬에 차이가 있어 유적의 연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인장와는 기와 제작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표시하고자 평기와(수키와, 암키와) 표면에 도장을 찍은 기와로 인각와, 인명와, 명문와로도 불린다. 생산 또는 검수 시 생산지나 생산자, 생산 연대, 사용처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행정지역 및 최고의 행정관청 또는 12간지가 찍혔다는 의견이 있다.
  이곳이 백제 수도였으며 서울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수부(首府)라고 찍힌 수부명기와도 있다. 부여와 익산 지역 백제시대 유적에서 60여 종이 집중 출토, 백제 후기의 특징적인 기와로 꼽힌다.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 사용됐던 기와 수막새로는 백제 후기 수막새에서 볼 수 있는 하트형 연판과 연판 내 인동, 꽃술자엽 장식, 연꽃 잎 끝의 단면이 S자 형태로 구부러진 연화문 수막새와 무문, 태극문 수막새가 나왔다.
  대형 항아리는 이름처럼 높이가 60cm에서 100cm에 이르며 편으로 출토된 걸 복원한 것도 있으나 완전한 형태도 있다. 땅을 파고 묻어 놓은 상태로 출토됨에 따라 저장용기로 보고 있다.
  냄비모양으로 입술부분이 깨져나간 전달린토기와 백제 최고 기술로 제작된 뚜껑이 있는 토기완, 용변을 보던 변기형 토기, 유개완도 있다. 백제 말 중국과 교류사실을 중국 청자연판문육이병과 배연시설 일부로 굴뚝 상부에 놓인 연봉형 장식 연가, 왕궁 내 있었던 일을 기록했던 벼루가 있다.
  건물 기초부를 구성했던 기단석, 기둥으로 전달되는 건물 무게를 받아 기단으로 분산해 주는 초석, 담장의 외부를 구성한 담장석, 정원 조사과정 중 수습된 정원석 같은 석제품도 일부 남아있다./이수화기자&#8231;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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