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남진정책 전진기지 '고부'··· '천년 위상' 떨치다

마한~조선까지 중요 거점지 4세기 중반 백제 영역 귀속 특별취재반l승인2017.05.18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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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부리성은 현재 정읍시 고부면 소재지에 있는 성황산(해발 133m)에 있다. 고부향교와 고부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나지막한 성황산이 바로 마한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역 거점으로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다.
마한시대에는 동진강 유역을 기반으로 여러 소국이 있었다.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고부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이는 고리비국을 비롯해서 초산도비리국, 모로비리국, 벽비리국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한 고리비국이 있던 고부지역은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 영역으로 귀속된다. ‘고사부리성’이라는 명칭이 현존하는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다. 여기에는 ‘온조왕 36년 8월에 원산·금현 2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온조왕 36년은 서기 18년이 맞지만 백제가 금강 이남을 공략한 시기가 4세기 중반인 만큼 근초고왕 때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백제가 마한 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고부지역은 주목을 받는다. 금강과 동진강 유역을 통합한 백제는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노령산맥 이남지역의 마한 세력을 통합해야하는 과제를 만나게 된다. 백제 남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고부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주요 거점으로 성장했다. 백제의 남진은 6세기 중엽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축출하며 마무리 된다.
백제는 성왕 16년(서기 538년) 웅진(공주)시대를 끝내고 사비(부여)로 천도한다. 성왕은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행정조직을 정비하는데 지방을 5방(五方)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고사부리성에는 5방 가운데 하나인 중방이 들어선다. 중방 위치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고사부리성은 중방으로 인정받게 됐다.
고사부리성에 대한 조사는 2000년에 시작됐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통해 문지, 우물, 건물지 등을 확인했다. 특히 백제 토기편이 수습되어 백제 때 처음 쌓았을 가능성이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 2002년에는 육안으로 확인되었던 민락정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고부읍성의 위상을 짐작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고부 구읍성에 대한 보존·정비를 위한 학술발굴조사가 2003년부터 진행됐다. 조사결과 축조방식과 출토유물을 통해 고사부리성이 각종 문헌자료에 등장하는 백제 중방성으로 비정됐다.
대표적으로 고부에 인접한 영원면의 은선리고분군 등에서 조사된 백제 중앙묘제인 횡혈식석분은 고사부리성이 백제 중앙세력과 깊은 관계 속에 있었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또 백제 지방통치를 엿볼 수 있는 오부명이 찍힌 ‘상부상항(上?上巷)’명 인장와(印章瓦)는공주, 부여, 익산 등의 왕실관계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고사부리성의 존재를 밝혀주는 단서다.
지난 1981년 전라북도기념물 제53호 '고부구읍성(古阜舊邑城)'으로 지정되었던 고사부리성은 2008년 사적 제494호로 승격 지정됐다. 사적으로 승격지정되는데에는 학술발굴조사가 결정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고사부리성 발굴조사는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 주도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가 축조하고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오랜 기간 지역의 중심으로 운영된 것을 확인했다.
조사 결과 고사부리성은 성황산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밝혀졌다. 성곽의 둘레는 1,055m로 긴 축은 418m, 짧은 축 길이는 200m이며 내부 면적은 63,494㎡이다. 고사부리성은 낮은 봉우리지만 정읍, 부안, 김제, 고창 인근까지 조망할 수 있는 시계가 확보돼 있다는 이점이 있다. 고부천과 동진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는 수로교통망과 남북으로 뻗은 도로교통망 등 지방의 거점지역으로서의 입지 조건이 탁월하다. 이런 입지를 지닌 고부는 노령산맥 이북 서부 평야지역의 중심지로 일관된 지위를 유지했다. 중방성을 설치한 이후 고부의 관할권역내로 편입된 경험이 있는 군현은 부안, 김제, 흥덕, 고창, 태인 등으로 고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방행정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데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고부, 정읍 이라는 행정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고 후백제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했다. 광종 2년에는 안남도호부를 고부로 옮긴다. 이는 고부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892년 전라지역을 기반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완산주에 입성하면서 자신이 백제의 후신임을 내세우는데 이는 백제를 그리워하는 귀소의식이 팽배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 속군현이 주현화되어 정비되면서 태종 9년 고부군의 속군현이었던 태산군과 인의현을 합쳐 태인현으로 만들어 현감을 두게 되었고 정읍현에도 또한 현감을 두게 되었다.
조선 영조 41년(1765년) 고부 관아지는 성황산에서 평탄대지로 내려온다. 조선초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읍성이 179개 나타난다. 당시 행정구역이 330여개 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반수가 넘게 읍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평지에 자리잡은 읍의 주위를 둘러싼 성벽의 일부가 뒤쪽으로 산 위에까지 뻗치고 있는 형태를 취하는 평산성의 입지를 선호하였는데 순수하게 평지에 축조된 형식은 조선 초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에 따라 고부군도 관아를 평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부군은 1914년 일제의 군현 통폐합으로 인해 정읍군으로 통합되어 현재 고부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여러 연구조사를 통해 고사부리성을 중심으로 한 고부의 가치가 증명되고 있는 가운데 심층적인 가치 창출과 다양한 활용방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지난 2013년 이민석 정읍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사부리성 가치 창출 및 활용방안’이라는 논고를 통해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백제 고도의 익산, 후백제의 전주, 그리고 백제 중방문화의 고부라는 3대 문화권의 설정이 가능하다”며 “고도 중심의 문화정책의 틀에서 벗어나 전북 특유의 역사문화권을 설정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녀 관광자원화로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었다.
/특별취재반

▲고부와 동학혁명
고부는 동학혁명의 발상지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들이 1894년 2월 고부관아를 습격하면서 동학 혁명이 시작됐다. 특히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는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지역이다. 이 승리는 동학농민군의 사기를 높여 줬고 동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 5방
백제 성왕이 정비한 지방행정 조직이다.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각 방에는 방성(方城)을 두어 방의 중심지로 삼았다. 각 방은 약 1천 명 정도의 군사를 두었다. 방 밑에는 군이 설치되었다. 5방은 △중방성(中方城) 고사성(古沙城) 고부 △동방성(東方城) 득안성(得安城) 충남 은진
△남방성(南方城) 구지하성(久知下城) 광주 또는 남원 △서방성(西方城) 도선성(刀先城) 충남 대흥 △북방성(北方城)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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