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전라도에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고을, 숱한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 바로 정읍이다.

새삼스런 설명이 필요 없지만, 구태여 정읍을 얘기하자면 내장산국립공원과 구절초테마공원을 비롯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는 관광도시이다. 또 근대사의 여명을 밝힌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정신과 1천 여년의 세월을 넘어 전해오는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의 숭고한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역사와 문화의 고장으로 이름 높다.

그뿐인가! 정읍은 윤봉길, 이봉창의사와 함께 우리나라 독립운동 3의사로 추앙받고 있는 구파 백정기의사 등 숱한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애국충절의 고장, 정읍의 중심에 영원 출신의 나용균(1895~1984) 선생이 있다. 나용균선생은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야당지도자로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선각자요, 금도(襟度)를 지닌 정치인이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전형적인 신사(紳士)였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한 그는 한국정치사에 큰 족적을 넘긴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선생은 국운이 기울어 가던 1895년 11월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에서 나도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일대에 널리 알려진 부호였다.선생의 생가(정읍시 영원면 164-1, 소유자 나영호 외 2명)은 189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9월 19일 자로 등록문화재 제276호로 등록됐다. 정식 등록문화재명은 정읍 나용균 생가 및 사당(井邑 羅容均 生家 및 祠堂)이다. 대지면적 1,687㎡, 사랑채 72.8㎡, 문간채 62.6㎡, 고방 39.5㎡이다.

나지막한 야산을 등지고 전면의 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부잣집으로 ㄴ자형의 문간채를 들어서면 아담하게 자리한 사랑채가 나온다. 현재 사랑재 우측의 안채는 헐리고 기단석만 남아 있다.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 가옥은 당시 지역의 주거사를 연구하는데 좋을 자료 일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생의 유적으로서의 의미도 크다 하겠다.

이제, 선생의 생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소년시절 완고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나용균은 19살 나던 1914년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일본 동경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수학하던 중 1919년 ‘2·8 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2·8선언은 한국인의 민족혼을 동경 한복판에서 떨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날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 3백여명이 운집했다.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가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경시청 순사들이 들이닥쳐 주모자급 12-13명을 간다(神田)경찰서까지 연행했다. 이때 나용균도 구금 투옥됐다. 당시 운동 자금의 대부분을 댔던 선생은 감방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1919년 7월, 선생은 출옥하자 마자 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길을 떠났다. 상해에서는 마침 임시정부 의정원회의가 열렸고 다른 2명과 함께 전라도 대표로 선출됐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이에 앞서 4월 13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는 이동녕의 주도로 상해·국내·노령(露領)등 각 지방의 대표자 29명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해 민주공화제를 표명하면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당시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등이 각각 임명됐다.

이정식(李庭植)교수(美 펜실베니아大)가 1969년 박권상씨와 함께 나용균을 만난 대담록에 따르면 그는 1921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혁명자대회에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참석한 것으로 돼 있다. 일명 동방(東方)피압박자대회라 불린 이 대회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레닌이 소집한 것이다.

우리 대표들은 소련이 약소민족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그들의 원조를 끌어내기 위해 여기에 참석했다. 여기서 나용균은 한국의 독립도 공산혁명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에 서명을 강요당했지만,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이것은 대표의 수임사항이 아니고 사실과도 어긋난다하여 끝내 거절했다.

혁명자대회에 참석한 후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내분에 휩싸인 독립운동 진영의 단합에 부심했다. 당시 독립운동은 지역별 인물별 이념별로 나눠져 그 정돈이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22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고 그는 준비위원으로 선임됐다. 위원장에는 남형우, 회계에 김철·원세훈, 서기에 나용균·서병이 각각 뽑혔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나용균은 1923년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정세를 더욱 익히기 위해 영국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런던에 도착한 그는 처음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갔다. 허나 학비가 너무 비싸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런던대학으로 옮겼다.

당시 런던대학에는 라스키 교수 등 정치 경제분야에 탁월한 교수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7년을 체류했다. 이 기간이 선생의 신사로서의 품격이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국유학을 마친 그는 1930년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동안 고국에서는 그의 부친이 일제에 의해 18번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 자식의 뒷바라지로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귀국 후 일제의 갖은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시골집에서 조용히 농원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토지개량사업을 해보라는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한때 전남에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당시 3천석을 추수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나용균은 동지를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사무국장에 선임되어 정치활동을 벌였다. 1948년 치러진 5·10 선거에 정읍(甲구)에서 출마, 무투표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국회 내무치안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미국 의회에서 대한(對韓)원조안이 부결되자 신익희 국회의장과 함께 국회대표로 미국에 건너가 원조안의 부활에 진력, 결국 교섭에 성공했다. 같은 해 민주국민당 대회에서 의장에, 1954년 민주국민당 정책위원장에 선출됐다. 1958년에는 고향에서 다시 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같은 해 UN 총회 대표로 뽑혀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60년에는 5대 총선에서 초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민주당 정권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1년에는 가족계획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에 추대됐다. 선생은 1963년 민정당을 조직, 최고위원에 피선되었으며 6대 총선에서 당선돼 야당 몫의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
1964년에는 국회에 국제의원연맹지부를 설치하고 부의장에 선출됐으며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의원연맹대회에 참가, 대회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66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의원연맹대회에서 운영위원장에 피선됐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선생은 1986년 91세를 일기로 사망,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국회에서는 백봉 나용균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하여 매년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수상해오고 있다./정읍=정성우기자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