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준승 선생은 1899(고종)년 11월 14일 임실 청웅면 옥석리 아랫배치(주치마을)에서 아버지 박호진(朴昊鎭)과 어머니 복씨(卜氏)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자(字)는 성래(聖來)이며, 천도교 도호(道號)는 자암(?菴)이다. 그의 가정으 ㄴ빈곤하였으나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7,8세경부터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10세가 지나자 같은 또래들을 가르치기도 하여 애기 선생이란 칭찬도 받았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청웅 남산리로 이사해 1890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에 접주(接主)가 되고 그가 41세 때인 1908년에 수접주(首接主)가 되었다.

 

당시 수접주인 그의 관할은 정읍·고창지구 천도교구의 총 책임을 맡는 것으로 그는 이 무렵 가족을 정읍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수접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진다.

 

1912년에는 천도교 장성대교구장(大敎區長)을 역임하고 49세 때인 1916년에는 전라도 도사(道師)로 추대됨으로서 천도교의 전라도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를받고 33인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33인 구성은 기독교계 16명, 천도교계 15명, 불교계 2명으로 되어있었다. 이 가운데 전북출신은 박준승 선생과 남원의 백용성(白龍城) 스님 두 사람이다.

 

손병희로부터 권유를 받은 그는 수도교인 유태홍(柳太洪), 박영창(朴永昌), 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매를 배부하여 장성, 남원, 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해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손병희,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고, 2월 27일 오세창, 최린(崔麟), 임예환(林禮煥), 권병덕(權秉悳),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홍병기(洪秉箕), 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52세였다.

 

경찰에 검거된 그는 철저하게 묵비권으로 심문에 응하였으니 그의 재판기록은 항상 백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갖가지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2년간의 옥고를 치렀는데 후유증으로 56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천도교장에 의해 정읍군 북면 마정리에 묻혔으며, 1945년 8·15광복을 맞고 1963년 당시 정읍군수와 지방 유지들이 협의하여 그의 유해는 정주시 구미동 성황산 아래로 옮겨 봉안하고 사당을 지어 충의사(忠義祠)라 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복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임실 3·1동산 독립기념비의 주벽으로 봉안되었다.

 

/임실=임은두기자 · led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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