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사 석탑 복원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세 번에 걸쳐 왕도를 옮겼기 때문에 왕도가 있었던 각각의 지역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는 문화를 남겼다. 왕도가 있었던 지역명에 따라 한강유역의 한성기, 공주의 웅진기, 부여의 사비기로 나누어 백제사의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백제사는 우리나라의 고대사 연구가 그러하듯 「삼국사기」를 중심에 두고 왕도와 왕조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문헌자료를 뛰어넘는 많은 자료들이 새롭게 발견됨에 따라 백제사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기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문헌에서 전라북도와 관련된 백제 기사는 “익산의 무왕과 미륵사 창건”, “김제 벽골제의 초축 및 중수”, “정읍 백제 중방성” 등이 있다. 이들 기사는 매우 소략한 것이어서 그동안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런데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자료들이 소략한 문헌기록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혀 새로운 사실들을 속속 밝혀내기도 한다.
  익산지역은 백제의 왕도 관련 유적들이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미륵사지와 왕궁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됨으로써 백제사에 있어서 익산의 위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고대 왕도를 경영하는데 필수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왕궁과 능묘, 사찰, 그리고 관방유적이 완전하게 남아있고, 당시의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동아시아에서 고대 도시를 복원하는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 바로 익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익산은 앞서 언급한 두 사서에서 백제의 수도라 볼 수 있는 정황적 근거는 있으나 직접적인 기록이 없어 그동안 사비시대의 별궁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따라서 왕도 중심적인 역사·문화의 연구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공주나 부여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져 유적의 정비나 복원 등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인 「관세음응험기」에는 익산 천도 사실과 제석사 화재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관세음응험기」는 불교의 영험한 기사를 다루고 있어 정통적인 역사서로서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었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제석사 인근에서 제석사 화재시 발생한 폐기물을 모아 버린 폐기장이 발견되면서 익산 천도설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왕궁유적의 발굴조사에서도 “수부(首府)”명의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서울, 곧 수도였다는 사실도 증명되었다. 특히 2009년도 미륵사 서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안에 있던 봉안기에는 미륵사가 왕비, 곧 왕실이 주관하여 조성한 사찰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왕실 주관의 사찰은 국찰을 의미하는 것인데, 국찰을 수도가 아닌 다른 곳에 건립할 이유가 있을까? 바로 익산이 백제 무왕 대의 수도라는 사실이 당시의 금석문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왜 익산에 수도를 새롭게 건설하게 되었을까? 성왕은 백제의 자긍심을 세우고 중흥을 이루고자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빼앗긴 백제 건국의 신화가 숨 쉬는 한강유역을 되찾았지만, 결국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고 말았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성왕은 관산성에서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그가 전사하게 된다. 이후 백제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무슨 이유에서 인지 위덕왕 이후의 혜왕이나 법왕의 재위기간도 1-2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는 소통과 화합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왕은 마한의 성립지인 익산에서 백제 중흥의 꿈을 이루고자 먼저 국가의 위업을 융성하기 위한 “왕흥사”를 완성하게 되는데 미륵사가 바로 그것이며, 이후 왕궁과 제석사 등의 왕도 유적 건설을 이루고 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한편 백제는 사비기에 들어 전국을 중방성, 동방성, 서방성, 북방성, 남방성 5곳으로 나누고  지방통치를 강화하였다. 오방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방 고사부리성의 위치가 현재의 정읍 고부에 해당하며, 특히 그 치소는 옛 고부읍성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치소가 특정되는 방성은 오방성 중 중방 고사부리성이 유일하다. 중방성과 관련된 고고학적인 유적은 옛 고부읍성 외에도 지사리, 운학리분구묘, 은선리고분군, 금사동산성 등이 해당된다. 고부읍성은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최초로 축조된 석성임이 확인되었고, 북문지에서 방성의 하부조직에 해당하는 “상부상항(上部上巷)”명의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중방 고사부리성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사리나 운학리의 마한 분구묘는 이곳에 중방성이 설치되기 이전의 기층세력인 마한세력의 문화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이다. 또한 은선리고분군은 백제 중앙 양식의 석실분으로서 중앙세력의 확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며, 곧 백제 지방 통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제 비류왕 23년(330년)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의 몽리지역에서 생산된 벼를 비롯한 농산물은 중방성이 정읍에 설치되게 되는 경제적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부안 백산성은 발굴조사 결과 산성이 아니라 물류 거점으로 밝혀졌다. 즉, 이 지역의 잉여 생산물을 외부로 반출하는 관문인 것이다. 이와 같이 벽골제와 백산성, 이 두 유적은 중방 고사부리성의 경제적 기반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여기자가 내게 던진 질문이 문득 떠오른다. “교수님, 전북의 백제 문화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자신있게 ‘마한 문화에 기초해서 성립된 전북의 백제 문화’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후백제는 왜 백제의 왕도였던 한강유역이나 공주, 부여가 아닌 전북에서 부활한 것일까? 그것은 중앙과 지방을 모두 아우르는 진정한 백제 정신이 전북에 살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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