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항상 해와 달과 별빛이 비치지만 내 가슴 속에는 일편단심 나라를 구하는 것뿐이다. 천추에 오직 내가 하여야 할 일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죽는 일이요, 이것만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3대 독자로 태어나 왜적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국권을 탈취하려고 하자 굳건히 떨쳐 일어나 구국활동에 목숨을 바친 정재 이석용 의병장.

  1914년 4월. 36세 젊은 나이로 가슴 뜨거운 생을 마친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피 끓는 마음으로 조국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외치다 대구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102년이 지난 지금. 그는 승화했지만 발자취는 뚜렷이 남아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숭고한 애국혼을 되새기고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이어가는 등불이 되고 있다. <편집자주>

●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호남의병창의동맹단’
  왜적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친일내각으로 구성해 국권을 탈취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격동기 1895년 8월.

  친일내각에 의해 단발령까지 내려지고 조선을 무참히 짓밟는 왜적들의 만행을 본 이석용 의병장은 세정을 살피고 학문을 넓히기 위해 당대의 석학들인 연재 송병선, 송사 기우만, 간재 전우 등을 두루 찾아 구국이념을 논했다.

  그러나 친일대신을 앞세운 ‘을사늑약’ 체결과 고종황제가 강제로 양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기울어진 대세에 의병을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석용 의병장은 호남땅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29세 나이로 임실군 성수면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해
전주, 임실, 장수, 진안, 남원, 순창, 곡성, 함양 등을 찾아 다니며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일본정부 앞으로 규탄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 건의문, 호소문 등을 발송하는 등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의병 모집 활동에 열을 올리던 중 성수면 상이암에서 규합된 동지들과 만나 거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 유명한 ‘격중가’를 지어 읊었다.

  ‘가을바람 소슬하니 영웅이 때를 만날 때라 장사가 없을 소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를 불러보세. 한양 성중 바라보니, 원수 놈이 왜놈이요 원수 놈이 간신이라. 삼천리 우리 강산 오백년 우리종사 어찌할까. 아마도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몰아내고 간신을 타살하여 우리 황제 받들고 우리 백성 보전하여 삼각산이 숫돌되고 한강수가 띠되도록 즐기고 놀아보세. 우리 대한 만만세’

  그가 지은 격중가는 의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전의를 고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같은 해 9월 12일 모여든 의인 500여명과 함께 마이산 용암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을 결성하고 임실, 태인, 진안 용담, 남원 영광, 고창 등에서 왜군과 교전해 격퇴시켰다.

  전북도를 중심으로 친일 활동을 일삼는 일진회원 처단과 공전영수원 등 세금을 징수하는 인원이나 세무서 등을 공격하고 가짜 의병 및 탐학을 일삼는 관리, 의병 배신자들도 징계와 다스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석용 의병장은 때로는 500여명, 300여명 또 어떤 전투는 10여명의 소수만을 이끌고 산과 들을 누비며 왜적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많은 전과를 올리는 중에도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은 부호가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거나 일본 군경으로부터 빼앗은 노획품, 면장이나 공전영수원 등이 거둔 세금을 빼앗아 충당해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최소화하는 등 의병의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했다

  특히, ‘불망록’을 통해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자신들을 후원한 자들의 이름, 거주지, 금액, 물품 등의 내역을 꼼꼼히 기록하기도 했다.

  이석용 의병장을 중심으로 호남민중들의 적극적인 독립투쟁은 왜군에게 큰 불안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고 결국 1908년 10월부터 1만여명의 병력으로 ‘호남의병토벌대’를 구성해 3차에 걸친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에 나선다.

  집요한 물량 공세에 몇 백에 불과한 의병집단은 버틸 재간 없이 곳곳에서 와해되기 시작했고 의병들의 지속된 희생을 지켜본 이석용 의병장은 후일을 기약하며 1909년 3월 6일 의병단을 해산시킨다.

● 의병단 해산 후 비밀조직 결성
  의병단 해산 후 1년이 지난 1910년 8월 29일. 치욕적인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조용히 분노했던 이석용 의병장은 이듬해 3월 옛 동지들을 규합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 암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2년 비밀결사대인 ‘임자년 동밀맹단’을 조직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는 중 성수면 삼청리 정동석의 밀고로 32세의 나이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 무력으로 꺽을 수 없는 굳은 절개
  폭도와 살인방화·강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을 때도 만인을 자유스럽게 보호하고 임금을 중심으로 나라에 충성하며 국권을 되찾고 싶은 그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재판장이 출석해 기립을 명령했으나 이석용 의병장은 “일어서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원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치가 어디 있느냐”며 일갈했고,

  간수들이 강제로 일으켜 세운 후에는 “네놈들이 강제로 나를 세우지만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꾸짖기도 했다.

  같은해 2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후 4월 14일 형장의 이슬로 승화한 이석용 의병장의 애국·애족 정신은 훗날 3·1만세 운동과 임시정부수립 등의 근간으로 뻗어나가 조국 광복을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

  ‘죽으면 시신을 전남 영암 월출산 기슭 남해 바닷가 일본 땅을 향해 묻어 달라. 저승에 가서라도 일본을 꼭 망한게 하리라’는 이석용 의병장의 유언은 죽어서도 조국독립을 위해 위국헌신하는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충절은 숭고한 역사를 지켜온 우리 겨레의 정신이자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을 건설하고 지식강국의 토대를 마련하는 원동력이 됐다.

  ● 임실군 소충사(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
  임실군 성수면 성수교를 지나 성남재를 끼고 울창한 숲길을 3km 가량 올라가면 부지면적 20,300평, 분묘, 사당, 기념관 등으로 구성된 임실군 소충사를 만나게 된다.

  소충사는 이석용 의병장외 28의사의 항일투쟁과 조국 독립을 위해 순절하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 계승 등을 위해 임실군이 총 사업비 22억원을 투입해 지난 2002년에 조성했다.

  임실군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박준승 선생, 이석용 의병장을 비롯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신을 희생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충절의 고장답게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는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개최된다.

  매해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의 혼을 달래고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소충사에서 제례를 지내는 한편,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는 소충·사선문화제를 개최해 지역 향토문화 전승·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역사 속 인물들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이를 정신유산으로 보전해 나가려는 다양한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석용 의병장 약력>
1878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출생
1906년 29세 임실군 성수면 상이암에서 의병창의준비
1907년 진안마이산 용암 주필대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
1908년 호남의병창의동맹단 대장으로 추대
1909년 태인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 격퇴 시킴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독립장 추서
1995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소충사 묘역내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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