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성 전남대학교 교수
 /이형성 전남대학교 교수

 

이형성 전남대학교 교수는 이재 황윤석의 실학사상에 대해 그의 생애와 저술·사상적 배경·사회경제 사상·서학에 대한 인식과 수학의 연구·실학사적 의의를 토대로 풀어냈다.

황윤석(黃胤錫, 영조 5~정조 15, 1729~1791)은 평생 여러 학문 분야에 관심을 뒀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역상학(天文曆象學)·산학(算學)·기하학(幾何學)·자연과학·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뿐 아니라 도교의 단학(丹學)양명학·선학(禪學)·병법·서술(筮術)·태을(太乙)·육임(六壬)·둔갑(遁甲) 등 잡술(雜術)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했다.

그는 10세 무렵부터 성리설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북학의 선구자 홍대용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학문 분야를 연찬해왔다. 

예를 들면 수를 기초로 자연과학 사상을 탐구하거나,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국방이나 민속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말의 어원에 대한 비교·분석에 나서는 등이다.

특히 최세진의 사성통해(四聲通解)를 참고해 훈민정음을 중국·인도·몽고 문자와 비교·고찰한 그의 연구는 비교연구에 하나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그런 그의 학적 태도는 학문을 어느 한 분야에 한정시키지 않는 ‘박학정신(博學精神)’,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궁리정신', 또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그대로 행동하려는 ‘실천정신’을 주축으로 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견해다.

황윤석이 살았던 무렵은 영·정조 시기다. 

그는 저술을 통해 통치의 정신과 원리에서부터 관료제도 운용, 토지제도와 사회제도·향촌자치제·재정운용방안·대외관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아울러 “지금의 계책은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근본을 올바르게 하며, 근원을 깨끗이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라며 근본의 확립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서얼차별·재가금지·노비세습제라는 비인간적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균등한 토지분배와 법도에 어긋난 재산 축적에 대한 통제 등도 제안했다.

이 교수는 황윤석을 서학의 자연과학사상, 특히 천문역법·산학·기하학 등을 수용해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사상적으로 정착시킨 소수 지식계층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는 많은 서학서적 가운데서도 특히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에 관심을 뒀는데, 이를 통해 당시 도량형 규격의 차이에서 오는 탐관오리의 수탈 행위를 방지하고 올바른 정사(政事) 즉 애민정신을 펼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또 서구의 과학사상을 수용해 지원설을 주장한 것을 비롯해 서양의 과학적 역법으로 동양 역법의 오류와 미비점을 보완하려고 하는 등,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수학’적 탐구를 진행해왔다.

이 교수는 그의 이런 탐구과정이 지극히 실학적이며 실용적 학문으로서 경세치용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이것이 바로 그의 자연과학사상의 특징이자 우리 과학사의 발전적인 면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이재사상의 실학사적 의의에 대해 제헌 심정진의 말을 인용하며 “체로서는 유학에 근본하면서 용으로서는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는 박학정신”이 황윤석의 사상이었다고 봤다.

특히 그가 서구 과학사상 가운데 수학을 탐구한 것은 수학이 모든 학문을 정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기틀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분석했고, 수학에 대해 정밀 탐구함으로서 조선 말기에 빈번하게 수학서책을 간행해 외세에 대항하려 했던 부국강병책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형성 교수는 “유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역의 변통론과 전통적 ‘수’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구의 과학사상을 치밀하게 분석·수용했다는 점이 황윤석의 실학사상의 특성”이라며 “즉 그는 단순히 ‘박학’ 내지 ‘백과전서적 학문’을 추구한 것이 아니고, 도(道)와 기(器), 본(本과 말(末), 내(內)와 외(外)를 체용론적 관점에서 겸비하거나 병진시켜 유학의 실학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순철 전북대학교 교수
박순철 전북대학교 교수

박순철 전북대학교 교수는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를 비롯해 번역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두루 언급했다.

이재난고는 황윤석이 10세부터 63세로 죽기 이틀 전까지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책이다. 이 책은 ‘종합적 생활일기’이자 비망기로 총 46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물이며, 1984년 9월 20일에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111호로 지정된 바 있다.

황윤석은 이재난고에서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일상뿐만 아니라 자신이 듣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창작한 모든 내용을 수록했다. 내용은 크게 일기, 기타 내용으로 나눌 수 있으며, 기타 내용에는 시문의 창작과 비평, 보고 들은 내용의 기록, 책을 읽고 분석하여 주석한 것들이 담겼다.

세부적으로는 자작 시문과 비평, 방언 등과 관련된 문학과 언어 분야, 향토사·삼국시대·삼국사기·고려사 등에 대한 분석과 관점, 단종과 장릉에 대한 기록이나 백두산 국경문제·지명유래 고찰·호남의 풍토 등이 담긴 역사와 지리풍토 분야, 사단칠정론·인물성동이론·심성이기설·오행·이기질설(理氣質說) 등에 대해 논한 철학 방면에서부터 호남차별·삼남·과거제도 폐단과 시폐(時弊)·율려와 도량형·축첩·개가·경재소와 유향소·당쟁과 탕평책·왕위계승·영조와 정조에 대한 관점·재혼과 정절·통혼(通婚)·축첩 문제 등에 대해 논한 사회 분야 뿐 아니라 군제와 성벽·조총·도서(島嶼)의 중요성(제주도와 다도해 등) 등 군사 분야 등이다. 

이외에도 예송논쟁·상제·복상과 시호·통혼 등 예학방면, 자명종·지원설·일식·월식·혜성·천문현상 등 과학방면, 불교의 폐단과 처방·민간신앙(성황당·관운장·억귀)·미신·도참·풍수 등 종교와 신학분야나 그림과 글씨에 대한 비평(신사임당·정선·최북 등) 예술 방면, 또 역사인물의 인물평·성종에 관한 일화·기인 일사 등 일화 방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록하면서 박대한 학문적 지식을 내보였다는 것이 박 교수의 평가다.

박 교수는 황윤석이 이재난고를 통해 수많은 분야에 대해 논한 것뿐 아니라 그가 보고 듣고 읽은 책을 초록하거나 절록하거나 인용한 내용도 다수 있다보니 ‘부풍향다보’, ‘탐라견문록’ 등 원본이 훼손되거나 없어진 서적들과 관련해서도 자료로 삼을 만한 자료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원본이 실전된 부풍향다보의 핵심 내용인 다명(茶名), 제법(製法), 다구(茶具), 다구도(茶具圖), 차의 특징과 성질, 증세에 따른 향차 처방, 향차 제조법, 향차 복음법을 기술해 한국 전통 제다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 점을 꼽았다.

박 교수는 이를 토대로 이재난고 내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수 있을 것으로 보고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봤으며, 이외에도 이재난고에 기술된 조선시대의 쌀값, 종이값, 밥값, 타지 생활에 필요해 구한 소실 값 등 생활과 밀접한 내용들도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며 중요하게 평가했다.

이재난고는 현재까지 전체 52권 가운데 9권 가량이 번역돼 출판됐는데, 박 교수는 198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지정 이후 이들 책들의 세부목록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점, 53권부터 62권까지가 새로 확인된 점 등을 토대로 이들 자료를 이재난고에 포함시킬지 여부와 관련한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박 교수는 이에 더해 이재 황윤석의 위상제고와 한국한문학사에서의 자리 확립, 문화콘텐츠 개발 가능성, 당대 생활상 복원을 토대로 한 스토리텔링 가능성 등을 토대로 번역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또 개인번역이 아닌 공동번역으로, 대중번역이 아닌 학술번역으로 진행할 것과 더불어 장기적인 계획과 세부적인 지침 마련과 전문인력 확보 등 세부적인 번역 방법에 대해서도 제시했다.

박순철 교수는 “이재난고가 오늘날 시점에서 다시 크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조선후기 미세사와 생활사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라며 “이 책에는 조선후기 사회의 인간군상과 생활상, 정치, 사회 이면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는 만큼 번역을 통해 관련 연구를 활성화시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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