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군 변산반도의 한 자락. 반계 유형원이 자리 잡은 이곳은 우반동(지금의 우동리)이다. 뒤로는 변산(봉래산)이 넓게 감싸고 있고 앞에는 산줄기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바다와 만났다. 그가 살던 초가집에는 책이 만권이나 꽂혀있었고 뒤뜰에는 천 그루의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푸른 잔디밭에 집터였음을 알리는 비석과 직접 판 것이라 전해지는 우물만 남아있다. 대대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큰 선생집터라고 불렀다.

변산의 큰 선생인 반계 유형원은 1622년(광해군 14)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부친인 유흠은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연좌되어 세상을 떠나게 됐다. 이에 어릴 적부터 고모부 김세렴(金世濂)과 외삼촌 이원진(李元鎭)의 도움을 받아 학문의 길을 걷는다.

15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의 발발로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전란을 피해 원주로 피난을 가기도 하고 지평(지금의 양평군)과 여주를 전전하며 청에 대해 절치부심한다. 이후에는 관직으로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전국을 유랑하며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32세의 나이에 우반동으로 온 그는 본격적으로 반계서당을 짓고 제자를 육성함과 동시에 학문에 몰두한다. 반계서당에서 만난 황재숙 문화관광해설사는 “이곳에서 반계 유형원은 20여 년의 세월 끝에 조선 최고의 국가개혁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완성했다”며 “26권 13책으로 이뤄진 반계수록은 토지, 군사, 교육 등 사회 전반의 개혁안을 담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부안군에서 ‘1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 전환과 유형원의 반계수록’이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정호훈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반계 유형원은 병자호란이 불러온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의 법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성격의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며 “공전제(公田制)를 중심에 두고 국가를 구상했다”고 전했다.

공전제 실행안을 담은 &#65378;전제(田制)&#65379;를 첫 번째에 배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공전제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고 이를 다시 신분·직역에 따라 차등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다.
반계의 육촌동생이자 제자인 유재원이 쓴 「반계선생언행록」에는 “지금 조선에서 노비는 재산이다. 사람이란 다 똑같은데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여기는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전에는 나라의 부유함을 묻는다면 말의 수를 세어서 대답했다. 지금 우리나라 풍속은 어떤 사람의 재산을 물을 경우 반드시 노비와 토지로 대답하니 여기서 이 법의 잘못, 풍속의 폐단을 볼 수 있다”고 쓰여있다. 실제로 반계는 조선 사대부 중 최초로 노비세습제 폐지를 주장했다.

유형원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은 반계수록 너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906번지의 논두렁길에는 우뚝 솟아있는 돌기둥 하나가 있다. 반계가 군사훈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우반동 훈련장 돌기둥’이다. 그는 이곳에서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조총과 활 쏘는 법을 교육했다. 200여 명의 묘수를 기르는 동안 끊임없이 북벌을 염원했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선박을 제조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을 담은 <중흥위략(中興偉略)>을 저술하기도 했다.

부안에는 반계를 배향한 동림서원이 있었지만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이 안 된 상태다. 지난해 김승대 학예연구관은 현지조사에서 「동림서원지」 등 고문서를 발견했다. 이번 발견을 통해 동림서원의 연혁과 관련한 부안지역 역사를 자세하게 살필 수 있게 됐다.

김승대 학예연구관은 “동림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한 서원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라며 “관련 문헌의 심층연구와 서당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임다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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