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출신으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많은 인물들이 있다. 최제학, 이인식, 고평도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의병장 최익현의 최측근 최제학, 3.1운동 당시 탑골공원 학생대표 이인식, 중국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고평에 대한 연구가 최근 활발히 진행됐다. 전북학연구센터가 지난해 진행한 학술지원사업을 통해 재조명된 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을사늑약 이후 전북지역 유생 습제(習齊) 최제학(崔齊學)의 항일운동(안성은·한국고전번역원)

전라도에서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일어난 최초의 의병활동은 태인의병이다. 태인의병은 의병장인 최익현과 임병찬이라는 생애와 사상, 그리고 전체적인 활동에 연구가 집중돼 왔다.

하지만 태인의병을 총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실제로 태인의병에 가담해 조력했던 인물을 발굴해야만 한다.

최제학(1882년~1959년)의 항일운동은 최익현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진안 목동(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1901년 최익현에게 집지(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폐백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인이 됨)하고 정식 문인이 됐다.

24세가 되던 1905년 2월 서울에 온 최제학은 일본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인해 최익현이 일본군들에게 곤욕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여 애국지사들이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등 시대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자연스레 항일 의식이 고취되었다.

이로 인해 최제학은 25세가 되던 해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최익현의 측근에서 태인의병에 가담했다. 최제학은 태인의병이 결성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최익현과 임병찬의 만남을 주선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최제학은 최익현이 창의를 위해 호남에 내려올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하면서 처소와 행선지일정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진행했다.

태인의병이 일어나자 최제학은 소모장으로 임명되어 각지의 의병을 모집했고 맏형 최제태와 가산을 모두 쏟아 부어 군량미와 군수품을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태인의병 해산 후 일본군 사령부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되자마자 대마도를 방문하고, 최익현이 순국이후 반구(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고향이나 제집으로 보냄)할 때에 사서직을 맡아 조객록, 부의록 등 7건의 기록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후 1907년 9월 고산에 사는 진사 윤자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다 좌절 이후 1915년 지리산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1917년 항일활동을 위해 중국 상해 이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조선총독부 호구조사에도 응하지 않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50일 동안 감옥 생활을 하는 등 이후 일제에 의해 여러 고초를 겪었다. 이처럼 평생 일제에 항거하며 살았던 최제학에 대한 연구는 소외된 이들의 항일운동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임피 출신 이인식(李仁植)의 독립운동(김두헌·군산중앙고)

이인식(1901년~1963년)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15세 때인 1916년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서울보성고에 입학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알려졌다.
이번 연구는 이인식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존의 연구 내용들을 사료로 검증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마련됐다.
그 결과 사료 등 전거를 찾아 밝혀 내용은 대략 다섯가지다,

첫째, 3·1운동 당시 활동에 관한 것이다. 3월 1일 오전 독립선언서를 민가에 배포하고 탑골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까지 행진할 때 미국 영사관과 연락을 책임졌다. 전북학생 대표로 활약했으며 5일에는 남대문 시위에 참여하고 그날 밤 11시경 송현동 자신의 집에서 동경 유학생 및 서울 시내 학생 63명과 향후 만세운동을 숙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해 11월 공판에서 징역 7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둘째, 임시정부 독립자금 기부에 관한 사항이다. 이인식은 3·1운동으로 체포된 종로서 유치장에서 임시정부 요원 이원형으로부터 임정이 자금난에 처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1920년 이인식은 상속받은 재산 8,000원을 갖고 만주로 가서 임정 요원에 기부하고 애국공채 1,000원 권 8매를 받는다.

셋째, 일본에서의 금우회 활동이다. 이인식은 1923년 일본 동양대학 인도지나 철학과에 입학하고 1924년까지 금우회를 조직했다. ‘금우회월보’를 발간해 회원에 배부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넷째 임피에서의 애국 계몽에 대한 것이다. 이인식은 1928년 8월에 임피 지역 야학에 의연금을 월 2원씩 기부했고 그해 11월 임피 보통학교에 소년 악대 1조를 기부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만주 목단강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다. 1929년 이후의 어느 시기 이인식은 만주 목단강 유역으로 가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남모르게 정보 수집, 군자금 조달 등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전북출신 독립운동가 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고평(1885년~?)은 공적이 밝혀지지 않은 채 국민의 망각 속에서 빛을 잃어 가고 있는 애국선열 가운데 한 분이다. 고평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고 자손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평은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에 있는 호남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고평은 1911년

7월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3년 4월 대종교 본사 전강에 임명되어 중국 연변 왕청현으로 이거하게 됐다.

1910년 대 후반 북간도 일대에서 강력한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렬한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대종교 세력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됐던 것이다.

고평은 연변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313 반일시위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의 최진동 진영을 중개하여 대규모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형성케 해 1920년 6월 ‘봉오봉 대첩’을 가능케 했다. 그해 10월 하순 김좌진, 혼범도, 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대규모 일본군을 격파한 ‘청산리 대첩’을 수행중일 때, 연변 동북지방인 훈춘 일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사실도 새롭게 규명했다.

해방 이후 고평의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근무한 점이다. 그는 1948년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이루어진 선거에서 72표를 얻어 사회인사 대표자 10인중의 1인으로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으로 선출됐다. 그는 이듬해인 1949년 3월초 빈민특위 제2부 배석판사로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정의의 심판을 내리게 됐다. 이후 10월 경까지 특별재판관으로 활동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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