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동네’서 근대역사를 다시 읽다

<7>군산 선양동 도둑이 들라치면 경찰도 포기했다는 좁디 좁은 계단 골목길 남아 전라일보l승인2019.11.10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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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 지배로 시작 된 제국주의는 20세기에 이르러 막바지 발악을 한다. 모든 유기체가 죽어가는 시점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듯이 국가도 마찬가지 행태를 띤다. 일본은 제국주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생존을 위해 식민지에서 가장 악랄한 억압과 핍박을 일삼았는데 그 대상인 조선이었고 그 중에서도 군산은 수탈의 정점 기지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근대역사 하면 생각나는 도시를 군산이라고 말한다. 작은 진포, 포구였던 군산 바다를 매립하여 인구 5만의 근대 계획도시로 만든 것이 군산이기 때문이다. 군산 월명동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에 가면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문화의 원형인 근대길이 바둑판 모양으로 깔려 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든 도로 폭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물망처럼 펼쳐진 길가에는 시간이 흘러 나이테처럼 옷을 갈아입은 근대건축물들이 새것인냥 즐비하다. 근대건축물은 일본인들이 살던 일본식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2009년부터 시작된 근대역사경관지구 사업으로 구도심이 재정비되고 남아있는 일본식 건축물들은 볼거리가 되어 일제강점기 역사를 체험하려는 수학여행단과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군산의 구도심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기형적으로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평지는 관공서와 일본인 거주지역, 산이 있는 지역은 조선인 거주지로 나뉘어져있다. 1899년 개항과 함께 시작된 군산도시계획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조계지 안에 살던 조선인들은 주변에 있는 산말랭이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군산에 있는 해망동, 신흥동, 흥남동, 선양동 등이 조선인들이 토막집을 짓고 살던 장소이다. 단칸방에 부엌이 있는 집으로 흙으로 막을 치고 짚을 덮은 모양이어서 토막집이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콩나물 모양이라 하여 콩나물집이라 하기도 했다. 
  그 중 선양동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선양동이란 동네의 이름은 해방 직후 1946년에 지어졌다. 높은 곳에서는 해 뜨는 것을 먼저 볼 수 있어서 먼저선(先)자와 햇볕양(陽)자를 붙여서 선양동이라고 불렀다. 선양동의 원래 이름은 둔뱀이었다. 금강하구 수덕산 자락에 있던 군산진에 있는 병사들을 먹일 수 있는 쌀을 생산하는 논배미가 있는곳이라는 뜻이다. 선양동은 안쪽에 있어서 안둔뱀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둔뱀이를 둔밤이라고 발음했고 밤을 밤율자를 써서 둔율동이라고 했다.
  임피 출생인 채만식 작가는 <탁류>속 주인공의 집을 선양동 말랭이로 설정했다. 작가는 <탁류>를 연재하던(1937년부터 1938년까지) 시기를 전후해서 끊임없이 군산조계지와 그 주변을 산책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찰했다. 그리고 해학과 풍자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삶을 제대로 표현했다.
  둔뱀이 말랭이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참봉 쌀가게, 콩나물고개, 뼈병원 골목(임정골원 골목), 소화통(중앙로 2가), 대정동(큰샘 거리), 군산공립보통학교(군산중앙초등학교) 등 소설 속 역사의 현장이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별반 변함이 없이 조선인들의 삶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탁류> 속 선양동은 넘어지면 코가 깨질 듯한 급한 경사가 진 고갯길 투성이다. 게딱지처럼 옴닥옴닥 붙어있던 토막집과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골목길이 탁류가 들려주는 선양동 모습이다. 도둑이 들라치면 경찰도 포기했다는 좁디 좁은 계단 골목길이 아직도 남아있다.
  오후면 어김없이 부는 해풍은 늦가을로 접어들면서 칼바람이 된다. 그 차가운 바람에서 홑겹의 옷을 입고 흙으로 막을 친 토막집에서 우리네 선조들이 살았다. 고지대라서 우물도 없어 물지게로 날라먹어야 했다. 달랑 방하나 부엌하나 겨우 작은 건너방 하나를 갖춘 7평가량의 토막집에 7-8명이 살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30평 아파트에 30명 이상이 살고 있는 격이다.
  먹고 살 일거리로는 지겟꾼, 메갈이공, 미선공, 인력거꾼, 식모살이, 날품팔이 등이었다. 바둑판 모양의 평지에는 대궐 같은 집을 짓고 대부분 일본사람들이 살고 조선 사람들은 토막집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온갖 궂은일을 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100여년 흐른 지금의 선양동은 어떠한가? 재해위험지구로 무허가 건물들이 헐리고 반쪽은 그들이 살았던 마당에 나무를 심어서 생태공원을 만들었다. 선양동 말랭이 전망대에 오르면 천리를 휘돌아 흘러 바다를 향해 달리는 금강이 가까이 보인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해도 볼 수 있다.
  선양동을 산책하다보면 나무가 심겨진 토막집이 있던 마당에서 당시의 삶의 애환이 들리는 듯하다. 식모살이하는 일본인 집에서 배고픈 가족을 위해 음식을 가져오다 혼난 이야기, 쌀에서 돌을 골라내는 미선공이 가족을 위해 갖은 방법으로 쌀을 가지고 오다 감독원에서 몸수색 당하고 맞은 이야기 등이다. 좁은 방에서 칼 잠자는 자식들을 위해 골목길을 배회하다 산말랭이에 올라 긴 한숨 쉬며 내일을 꿈꾸는 아비의 모습도 보이는듯하다.
  선양동 근처에는 둔율동 성당이 있다. 개복동 교회도 있다. 교회는 선양동 사람들에게 어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한 신자들의 생활을 안내 했다. 교회에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삶은 주체적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5일에 3.1만세운동이 호남최초로 군산에서 일어났다. 그 운동은 5월 말까지 이어졌고 두 달 동안 28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군산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6천여명이었다 하니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숫자를 평균내면 한 명당 평균 4회 정도 참여했다고 보면 된다. 선양동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 또한 만세운동의 주체였다.
  일제강점기 현장에서는 수탈과 저항이야기가 함께 풀어져야한다. 그리고 꿈을 꾸어야 한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분단 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이루어 가는 꿈, 모든 국민이 복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이루어가는 꿈을 꾸어야 한다.
  군산 선양동 즉 햇빛동네에서 건강한 조선인들의 삶의 정신을 만나보자. 오후엔 시원한 바람이 부는 햇빛동네로 올라가 보자.
/문정현 사단법인 아리울역사문화 대표
사진 제공=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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