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시면서 그 근원을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를 살리는 것들에 대해 고마움을 갖는 마음은 나도 살고 공동체가 사는 지름길이다. 마을이야기를 생각 창고에 담다보면 물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 마을에서 살고 있고, 살다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마을의 산천과 닮아 있다.
  물방울 하나를 보고 큰 바다의 원리를 알 수 있고, 모래 한 알 속에서 사막의 원리를 알 수 있듯이 작을 마을을 여행하면서도 역사의 원리를 알 수 있다. 이 번 글에서는 성산면의 창오리, 성산리, 여방리의 옛사람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거꾸로 시간여행을 해 보려고 한다.
  성산면은 금강을 곁에 두고 포구로 이어졌던 곳이다.  군산은 강과 바다, 들판과 호수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이 어우러져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북쪽에는 장수군 물뿌랭이 마을에 있는 뜬봉샘에서 솟아난 물이 서해바다를 연모해 천리를 달려오면서 금강을 이룬다. 그 하구에 군산시 성산면이 있다.

  성산이라는 말은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이다. 백제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의 선봉으로 소정방이 금강줄기에 있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를 점령하려 할 때 금강하구에서 목숨을 걸고 대항을 했던 다섯 성인들의 무덤이 있어서 오성산이라 이름 했다.
  오성산이 있는 주변 8개 마을을 아우르는 면 이름이 성산이다. 마을의 유래를 보면 재미있다. 높은 산 봉우리가 있어서 고봉리, 고봉산 아래 계곡이 있어 산곡리, 오성산이 있어서 성산리, 마을에 언덕이 많아서 둔덕리, 창고가 있고 오동나무가 많아서 창오리 등이다.
  성산면 창오리에는 진성창이 있었다. 고려시대 12조창 중 하나인 진성창은 고려우왕 진포대첩의 원인 제공을 했던 곳이다. 전주와 익산 주변에 이르는 들판의 쌀을 모아놓았다가 개경으로 실어갔다. 배고픈 왜구들은 그 쌀 냄새를 맡고 들끓다가 드디어 1390년 금강하구로 쳐들어왔다. 최무선 장군의 전략과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피해도 만만치 않아 진성창이 다른곳으로 옮기게 되고 흔적만 남아있다. 
쌀을 우마차에 실어 쌀 창고로 옮겨 오다가 다리를 건널 때면 덜컥덜컥 소리가 나서 덜컥 다리라고 했던 곳이 요즘은 우마차 대신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로터리가 되었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는 아직도 덜컥다리 라는 말이 남아있다.
  덜컥다리를 지나 마을 입구로 들어오면 창안 토성의 일부가 동네 입구에서 반갑게 맞이한다. 마을이 끝나는 자리에 고개가 있는데 고개이름이 창안재다. 고개를 오르다보면 양옆으로 펼쳐지는 토성의 모양이 기러기 같다고 해서 창안토성이라 했다. 판축기법으로 만들어진 창안토성의 금강쪽으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을 갖고 있어 적들이 쉽게 법적하지 못할 위용을 갖추고 있다.
  마을에서 창안재를 오르기 직전에는 칼바위가 있다. 적들이 왔을 때 기세를 꺽기 위한 장승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군이 말에서 내리기 편리하라고 만들어놓았음직한 커다란 바윗돌이 있다. 몸에는 문양까지 새겨져 있는 데도 불구하고 길을 포장한 콘크리트에 묻혀 그 볼품이 훼손되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아마도 장군과 병사들의 하마석로서 제격이었을 게다.
  마을 중간쯤 이르면 창안석불이 있다. 고려시대 장군을 닮은 듯 나쁜 기운들을 지켜주길 원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일 게다. 미나리꽝에 목이 잘린 채로 처박혀 있던 석불은 머리 부분을 새롭게 이식하고 비가 맞지 않는 건물 안에서 여전히 마을의 안녕을 바라고 서 있다.
  창안석불을 뒤로하고 쌀을 실은 우마차가 가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성산 끝자락에 이른다. 일광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오른쪽 잡목숲 속으로 들어가면 금강하류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숨어있다. 금강 바람이 멀지않은 곳에서 불어오고 솔향기가 가득한 곳에 집채만한 바윗돌이 세월의 힘에도 끄떡없을 거라고 믿었던 후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몸에는 별자리를 또렷이 새기고서 청동기 시대의 역사를 온 몸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은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책이다
/문정현 (사)아리울역사문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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