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필자는 익산시 영등동에 ‘이희성 변호사의 착한법연구소’를 설립했다.

위 연구소를 설립한 취지는 시민들이 시민들 자신을 위하여(for the weak) 착한법을 찾아 입법을 청원하자는 것인데, 착한법연구소는 맑은 공기 마시는 법, 산부인과 살리는 법, 신나는 어린이법, 바쁜 엄마를 돕는 법, 어르신이 편안한 법, 청년이 꿈꾸는 법, 워라밸하며 일하는 법, 착한 사장님이 돈버는 법, 농부의 시름을 달래주는 법, 종교가 상생하는 법, 교육도시 익산을 만드는 법, 문화예술을 꽃피우는 법, 찬란한 마한백제법 등 13개 분과를 두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란 '몫 없는 이들', 다시 말해 공동체에서 소외된 이들이 자신의 몫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the weak)은 몫이 없다. 그래서 비록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포퓰리즘(엘리트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주의)을 악용하기는 하였지만, 포퓰리즘은 끊임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엘리트카르텔에 대항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삶은 돈이 아니다. 인간이 추구하여야 할 다양하고 소중한 가치가 오로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되어 획일화, 서열화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돈이 안되면 쓸데 없는 짓에 불과하고, 돈이 없으면 인생을 망친 것이며, 돈에 초연하면 아직도 철이 덜 든 것이다. 사회보장이 제대로 안되어 있는 나라에서 각자도생의 두려움에 굴복한 것이다. 아니 생존의 무게에 소극적으로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본 그 자체로 변신하고 자본의 증식이 삶이 된다.

착한법은 돈 많이 버는 법이 아니다. 아이들의 성적을 올려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는 법도 아니고, 청년들을 좋은 직장에 취업시키는 법도 아닐 뿐더러, 바쁜 엄마의 맞벌이 소득을 올리는 법은 더욱 아니다. 그냥 돈이나 많이 벌어서 각자 잘먹고 잘사는 그런 법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착한법은 주권자인 시민의 몫을 제대로 확보해, 법이 시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자들 내지 기득권자들의 이익만을 대변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의미한다.

한편 민주주의는 대의제가 아니고 1인 1표 보통선거도 아니다. 사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요구한다. 대의제는 대리인이 오히려 주인노릇을 하는 주인-대리인문제(agency problem)를 피할 수 없고, 선거는 주인노릇을 하는 대리인들의 교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이상은 치자와 피치자가 교체되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그리스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이미 이루어졌던 바로 그것 말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직접민주주의는 자칫 국민의 이름을 내세운 전제적인 통치를 불러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민의 경험적 의사(현실에 표출되어 나타난 국민의 의사)에 대한 추정적 의사(국민전체나 국가에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잠재적 의사)의 우위성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착한법연구소는 엘리트 정치인에게 착한법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모여서 직접 착한법을 찾아보자는 것이고, 비록 입법권은 없지만 입법청원제도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즉 법은 본디 시민을 지배하는 도구였지만, 이제는 시민 스스로가 자신에게 이로운 법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여 모두가 공정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희성 변호사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