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얼마 전 아시안컵 축구가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와 사우디가 맞붙은 경기에서 승부차기로 우리가 이겼다. 경기를 마치고 손흥민 선수가 상대 선수를 일일이 안아주며 패배를 위로했다.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선수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 선수는 자신의 축구 실력을 아버지 작품이라고 고백해 왔다. 손 선수 아버지는 축구하는 까닭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교육했다. 축구와 인성이 어떤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강의실에서 글쓰기에 대해 교육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글을 잘 쓰는 글쟁이에 머물지 말고, 삶을 잘 사는 삶의 경영자가 되라고 힘줘 말한다. 

 경쟁 사회에서 상대를 짓밟지 않으면 자신이 패배하는 게 당연한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생존 논리는 야생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동물과 달리 이성을 소유한 인간세계에서도 적나라하고 은밀하게 움직인다. 동물의 본성을 깊이 드러낸 표현이 짐승이고 사람의 악성을 두루뭉술한 덮개로 덮은 표현이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인성을 품어야 한다. 

 ‘다움’을 상실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있을 뿐이다.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유리한다. 머릿속에 지식의 총량이 차고 넘치는 지식인이 인간답지 못하면 많은 정보를 입력한 기계에 불과하다. 어떤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가 인성이 없으면 지도력은 썩은 새끼줄같이 파열된다. 돈 많고 권력 있는 것을 출세의 기준으로 삼은 지 오래되었다. 이른바 밥상 교육은 박제된 채, ‘라테’의 박물관에 먼지에 덮여 잊히고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게 공부 잘해야 출세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적 올려라. 명문대학에 들어가야 인생이 핀다는 따위였다. 공부 잘하면 모범생이고 다른 데 관심을 가지면 문제아로 취급했다. 교사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 일방적인 수업은 질문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아 저마다 섬같이 떠돌았다. 도와줄 줄 모르고 도움받을 줄 모르는 단독자가 되었다. 

 이렇게 길들여진 학습자 대부분은 공동체 의식이 기우뚱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경향은 문제로 자리 잡지 않고 문화로 변신한다. 우리나라가 겪는 저출산 문제는 복합적인 사회 문제로 빚어진 것이지만, 가족공동체에 대한 결속이 풀어진 탓도 한 기둥을 이룬다. 문제가 오래되면 문제를 목격하는 데 익숙해져 불감증에 이른다. 

 더욱이 지구공동체나 인류공동체라는 말에 우리의 시각은 구경꾼에 머물고 있다. 아프리카 빈민국 국민의 기아를 그들만의 일이라고 여긴다. 바다 건너편 나라에서 생긴 기후 위기를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심하다. 타자와 경계 짓기에 익숙한 이른바 구별의 관성은 지구가 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지우게 한다. 이웃 국가가 겪는 문제가 우리나라 문제이고, 우리나라가 겪는 문제가 이웃 국가의 문제다. 

 우리는 약자가 겪는 고통에 마음이 긁히지 않고 구경거리로 즐겨 삼는다. 무너진 공동체의 토양에서 공동선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리 만무하다. “나‘라는 이기의 울에서 벗어나 타인의 존재를 바라보는 따스하고 친밀한 눈을 가져야 한다. 타인이 겪는 고통에 감각할 줄 모르면 공동체는 유연성을 상실하고 경직된다. 타인의 고통을 사소하거나 사적인 고통으로 가두면 안 된다. 

 시인 ‘오드리 로드’가 그랬던가.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울부짖는 곳에서, 우리는 이들의 언어를 발견하여 함께 읽고 공유해야 한다.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독해할 책임이 있다.” 고통은 여러 얼굴로 찾아오므로, 고통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타인의 고통을 불구경하듯이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소비자에 머물면 안 된다. 고통의 주어가 되어주지 못할망정, 썰렁하지 않게 보조사로 곁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는 지금 타인이 겪는 고통에 얼마나 접속하고 있을까.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