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정경세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서애 유성룡의 제자가 되어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었다.  1611년(광해 3) 2월에 전라감사로 도임하여 7개월간 재임하였으며, 인조반정 후 홍문관 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이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남인의 우두머리이면서 서인인 송준길을 사위로 삼았다.

상주 정경세 종택(국가민속문화재, 문화재청)
상주 정경세 종택(국가민속문화재, 문화재청)

 

▶경상도 상주 출신의 진주 정씨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아버지는 정여관(鄭汝寬)이고,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공가(李公軻)의 딸이다. 정경세가 2품에 오르면서 부ㆍ조부ㆍ증조부 3대가 추증되었다. 

그의 생김새는 키가 크고 이마가 넓었고, 신채(神采, 정신과 풍채)가 뛰어나고 헌칠하였으며, 두 눈은 광채가 환히 빛나고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쩌렁쩌렁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실린 그의 신도비 기록이다. 

그는 상주시 청리면 율리마을(밤나무골)에서 태어났다. 태생지에 유허비가 서 있다. 1602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서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우산(愚山) 자락의 마을로 그의 호 우복은 이 산에서 연유하였다. 

현재 우산리에 종가가 있고, 종가 우편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누정 겸 서실 대산루(對山樓)가 있다. 낙향하여 은거했던 초가 계정(溪亭)도 대산루 옆에 상징적으로 복원되어 있다. 종택은 국가민속문화재로, 대산루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산루는 1602년에 처음 짓고 177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건물 벽에 공부 ‘工’자가 연속해 써 있다.

그의 집안이 상주로 들어온 것은 9대조 정택(鄭澤)이 상주목사를 지내면서 아들 한 명을 상주에 살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상주는 조선 전기에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던 큰 고을이다. 경상감영은 임진왜란 직후에 대구로 이전되었다. 경상도 지명이 경주와 상주의 앞 자를 따 온 것이다.  

상주 대산루-정경세 누정 겸 서실(보물, 문화재청)
상주 대산루-정경세 누정 겸 서실(보물, 문화재청)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고 전라감사 역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해 오자 정경세는 18살에 그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20세 때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4세이던 1586년(선조 19)에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ㆍ봉교 등 사관(史官)과 홍문관 정자(正字)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정여립 모역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문관에 있으면서 여립의 조카 이진길을 천거하였다고 하여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부친상을 당해 낙향하였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부인과 동생 정흥세를 잃었다. 시강원 문학, 홍문관 교리, 경연시독관, 이조정랑 등을 지내고 1598년 좌승지를 거쳐 임금의 특명으로 경상감사에 임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영해부사를 지내고 낙향하여 성람(成濫) 등과 함께 사설 의료기관 ‘존애원(存愛院)’을 율리에 설치하고 임진왜란 후 병마에 시달린 주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존애원은 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부사,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1610년(광해 2) 10월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부임하는 날 다시 전라감사로 영전되었다. 이듬해 1611년(광해 3) 2월에 전라감사로 도임하였으며 9월에 정인홍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전라감사로 7개월 재임하였다.

정경세 필 간찰(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움)
정경세 필 간찰(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움)

 

▶유성룡의 제자로 퇴계 학통을 이은 대학자

정경세는 서애 유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이 서애를 통해 정경세에게 전해졌다. 조경(趙絅)이 지은 그의 신도비에 “공의 학문은 서애 유성룡 상공(相公)으로부터 나왔고 서애의 학문은 퇴도 선생(退陶先生) 이황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정경세는 도학(道學)이 정몽주로부터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성되었고, 김굉필ㆍ정여창ㆍ이언적 등의 현인이 나와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모시는 서원을 영남의 상부인 상주에 건립해야 한다고 하고 유림들을 설득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고 5현(五賢)을 종사(從祀)하여 후학들에게 도학의 정통을 각인시켰다.  

강릉부사를 지내고 삭직되어 상주에 칩거하다가 인조반정 후 홍문관 부제학으로 복직하여 대사헌, 도승지 등을 거쳐 1629년(인조 7)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경전에 밝았고,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남인의 영수로 서인 송준길을 사위로 맞이

송준길은 충청도 회덕 출신의 은진송씨로 송시열과 함께 서인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회덕의 은진송씨는 연산의 광산김씨, 이성의 파평윤씨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충청도 3대 명문이다. 정경세는 남인이면서 당색이 다른 송준길을 사위로 삼았다. 

정경세는 남인이면서 서인을 적대시만 하지 않고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성향은 상주의 지역 특질과 관련지어 논해지기도 한다. 상주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유연한 특질이 있다고 한다. 정경세가 죽자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하는 시장(諡狀)을 작성한 사람이 우암 송시열이다. 

송준길이 정경세의 사위가 된 것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우복 정경세는 남인이면서도 서인 사계 김장생과 가까웠다. 우복과 사계는 예학의 대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루는 정경세가 김장생의 문하에서 딸의 사윗감을 찾기 위해 방문하였다.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 초려 이유태가 공부하고 있었다. 정경세를 보고 우암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으니 우리 선생님은 하도 고명하셔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그때마다 예를 갖추면 공부는 언제 하느냐고 했다. 규장각에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는 편액이 있다.  

동춘은 적당하게 예를 갖추었고, 초려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정경세는 사윗감을 동춘으로 결정했다. 정경세와 김장생은 아들을 낳으려면 우암 같아야지만 사위는 동춘처럼 부드러운 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을 같이했다.

송준길은 결혼 첫날 밤 정경세의 딸에게 삼종지도를 물었다. ’태어나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인데 지아비가 늙으면 아들을 따른다고 답하였다. 틀렸다고 하자, 정경세의 딸이, ’그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난 첫날부터 남편이 죽는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하였다. 이 삼종지도 이야기는 미암 유희춘과 송덕봉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

      

▶강보(强輔), 강력한 내조자라고 일컬은 이씨부인

정경세의 신도비 비문에 보면, 그가 진성이씨(眞城李氏) 부인을 ‘강보(强輔: 강력한 내조자)’라고 일컬었다. 광해군 때 그가 김직재의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몰려 가택 수색을 당했는데, 광해군이 압수한 것을 살피다가, 부인이 쓴 언문 편지에 임금을 언급할 때 줄을 바꾸어 높게 쓴 것을 보고 이런 집에서 반역할 리가 없다고 하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씨부인은 이황의 스승 이우(李堣)의 증손녀이다. 첫 번째 부인 합천이씨(陜川李氏)는 임진왜란 때 죽었다.

그는 말년에 건망증으로 자주 쓰는 물건이나 자식들 이름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 주자에 미치면 정신이 맑아지며 몇 줄의 글을 들고서도 그 뜻을 자세히 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호는 문장(文莊)이고,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이 있다. 묘는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 솔안마을에 있으며, 신도비는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상주 도남서원, 대구 연경서원, 경산 고산서원, 강릉 퇴곡서원, 개령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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