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규, 시인
  /송태규, 시인

                                                                                       /송태규, 시인

‘제3회 장수 사과랑 한우랑 전국자전거대회’장에 가는 길. 산허리에 안개가 잔뜩 풀어져 있다. 어릴 때 안개가 낀 날 “오늘도 무덥겠다”라는 어른들 말씀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는지 궁금했는데 그날이 안개 낀 아침이었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깨달았다. 여름은 얼추 지났다지만 오늘도 한낮은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듯하다.

동그라미 두 개에 얹힌 안장에 의지해 장수 골짜기 내리막 오르막 88km를 헤쳐나가야 한다. 출발한 지 얼마가 지나자, 땡볕을 몸으로 받으며 페달을 굴렀다. 저만치서 길이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나를 내려보고 있다. 이때는 자전거와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 앞 기어를 낮추고 뒤는 올려야 한다. 그래야 내 몸의 무게를 쪼개서 길을 담을 수 있다. 길의 결을 알아차리고 어루만질 정도가 되면 비로소 자전거 고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길과 자전거와 그 위에 얹힌 내 몸은 피할 수 없는 삼각관계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균형을 잡을 때 비로소 세상으로 스며들 수 있다. 길은 등을 내어주되 결코 지나가는 자전거에 짜증을 내거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어쩌다 자전거와 몸이 쓰러지면 그걸 보듬어 안고 같이 아파할 뿐. 자전거는 바퀴를 굴려 길을 빌려 쓰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때론 울퉁불퉁한 길을 만나면 저를 맡긴 채 흔들리며 함께 부대낀다. 몸은 길의 경사에 따라 자전거의 기어를 조절하여 힘을 쪼개고 앞길을 뒤로 보낸다. 마침내 몸은 지나온 길과 자전거를 돌아보며 그 노곤함을 위로한다.

‘전방 200m 1차 보급소’. 오르막 3km 정상에 오아시스가 있다는 표시다. 눈에 번쩍 들어오는 간판이 살랑살랑 다가오는 첫사랑만큼이나 반갑다. 힘을 집중하여 남은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순간 모든 세포가 반응한다. 피부의 구멍이란 구멍이 온몸을 적신다. 날렵하게 치고 나가는 선수들의 넓적다리와 장딴지 근육이 바퀴처럼 울퉁불퉁 갈라졌다. 게으름만 먹고 자란 내 허벅지를 돌아보기가 민망했다. 정상에 올라 뜨거운 숨을 내려놓고 내리막을 달리면 모든 땀구멍이 투명한 바람을 맞이한다.

아름답다는 장수의 산천초목을 눈에 담을 틈도 없이 이러구러 절반을 달렸다. 약 10km 가까이 이어지는 오르막을 마주했다. 가장 힘든 코스다. 떨어지는 땀방울에 맞으면 발등 깨질까 무서웠다. 이제 꼭대기를 밟으면 고갈된 연료를 보충하고 먼저 간 동료들이 날 기다려줄 2차 보급소가 있다. 정상이 가까워지는데 곁에서 하나둘씩 패잔병이 늘어간다. 휘청이며 자전거를 끌거나 낙엽이 되어 그늘에 드러누운 선수들이 보인다. 참 고약한 유혹이다. 가뜩이나 지친 몸인데 만약 혼자서 이런 언덕을 오르다 보면 자신과 타협하고 진즉 낙오했을 수도 있다. 저만치 앞서가는 선수의 꽁무니를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기를 쓰며 정상에 올랐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대중의 힘’ 덕분이다.

오르막이 10km면 내리막도 비례한다. 그걸 알기에 꾸역꾸역 심장을 덥히면서 오르지만 내려오는 길은 너무나 허전해서 아쉬운 입맛만 다신다. 대신 언젠가는 내가 지나야 할 골인 지점이 가까워진다는 보상심리로 페달에 힘을 가했다.

오늘 4시간을 넘기는 장수 대회에 무사 완주하면서 노곤한 추억을 듬뿍 받고 왔다. 땡볕에 달구어진 길에서 애써주시는 자원봉사자들을 지나칠 때마다 큰 목소리로 감사하단 말을 전했다. 나의 자그마한 수고로 그분들의 어깨에 앉은 더위가 달아날까마는 그 좋은 기운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작은 응원 한마디가 사람들을 돌아 더 크게 퍼져나가면 내 가슴은 더욱 뿌듯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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