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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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세진(문화비평가, 시인)

  여행을 잘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이국의 풍경은 <EBS 세계테마기행>으로 만족하고 있는데, 얼마 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보게 되었다. 맑고 아름다운 정경이 인상적이었는데, 며칠 후‘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의 폐해에 대한 어느 뉴스에서 대표적인 공간으로 소개한 곳이 바로 그 두브로브니크였다. 맑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정경은 연출에 불과했고, 인구 5만 명의 도시에 원주민의 몇 배가 넘는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연중 도시 곳곳을 메우고 있는 놀라운 풍경이 정확한 실상이었다.  

  노발리스(1772∼1801)는 소설 『푸른 꽃』에서 이렇게 썼다. “식물이나 나무, 언덕이나 산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름대로의 시야와 고유한 고장을 갖고 있어요. 이러한 고장과 자연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자연의 생김새와 모든 성질은 고장으로 설명이 돼요.”

  220여 년 전에 노발리스가 말한 ‘고유한 고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로 인해 각국의 대도시들은 서로 닮은 모습으로 바뀌었고, 중소도시들은 대도시를 닮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관광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고유한 문화를 자랑했던 공간들은 특징 없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고,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될수록 원주민의 몇 배나 되는 관광객이 공간을 점령하는 기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관광은 결코 겸손한 욕망이 아니다. 관광은 다른 사고, 다른 취향(음식, 의상, 놀이 등)의 이동을 의미한다. 관광객이 관광지의 고유한 사고와 취향에 순응하지 않고 그 공간이 만들어내지 않은 취향(음식, 의상, 놀이)을 고집스럽게 요구하고 재편을 강요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자본 앞에 무력한 관광지는 그 요구에 굴복하여 자본주의가 낳은 풍경을 자신들의 공간에 이식하고 결국은 고유함을 잃고 만다.  

  자본에 압도된 원주민들은 공간이 그들에게 부여했던 생김새와 성질, 시야를 관광산업 종사자의 그것으로 변형시키고, 특정 공간이 수백 년 동안 유지하며 문화적 형질로 부여했던 것들을 스스로‘관광객의 시선’에 맞추어 변질시킨다. 

  오버투어리즘은 단순히 특정 공간에 사람들이 과도하게 몰려들고 있다는 의미의, 생태적 과부하의 문제에 그치는 현상이 결코 아니다. 특정 공간의 생태와 문화를 외부인들이 왜곡하고 파괴하는 현상이다. 관광객이 몰려들수록 원주민은 숫자적으로 특정 공간에서 소수가 되고, 문화적 파괴를 막을 물리적 힘을 잃게 된다. 

  문화철학 분야의 석학 프랑수아 줄리앙(1951∼)이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라는 책에서, 고유한 점도 변화하기 때문에 ‘정체성’이 논점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분명 옳은 이야기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고유함은 아직 존재하고 그걸 잃게 되면 관광객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들에게는 그 공간이 고유한 것이 아니라, 대체가능한 유흥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유함을 파괴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고유함을 파괴하는 존재로 살고 있다. 고유함을 존중하는 검소한 이동만으로도 너무 벅차, 지금 지구는 숨을 헐떡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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