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인제대학교 교수

                                                                       /이동희  인제대학교 교수 

  전라 동부지역은 종래 마한·백제권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1982년에 전북 남원 월산리 고분군 발굴조사 이래로 다수의 가야계 고분군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전라 동부권의 고대사는 최근 발굴조사성과로 인해 마한과 백제 사이에 가야의 문화적·정치적 영향력하에 들어갔던 시기(5세기중후반-6세기초엽)가 있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을 반대하는 ‘도민연대’ 측에서 제기하는 핵심 논제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사현(任那四縣)’과 ‘기문(己汶)’이 일본에 있었기에 전라동부지역에 비정하면 안 된다는 단순 논리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논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는 주체적인 역사서를 가지지 못했기에 다양한 표기로 등장하는데,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은 가야, 가라, 임나이다. 임나는 『일본서기』에서 가야의 이칭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우리나라 기록에도 등장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414년 건립된 광개토왕비문에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활동을 벌인 곳으로 ‘임나가라’가 나온다. 924년 건립된 진경대사탑비문(김유신의 후손인 진경대사의 속세 성은 김해김씨이고 선조는 임나의 왕족), 삼국사기 강수 열전(강수 스스로가 임나가량 사람이라고 소개)에서도 확인된다. 

 문헌에 보이는 임나사현과 기문을 분석해 보면 공통점은 백제와 가야의 경계에 자리했고 처음에는 가야에 속하였다가 6세기전엽에 백제로 영역화된다는 점이다. 지명이나 고고 유물로 보아 이러한 조건에 맞는 지역은 전라 동부권에 해당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기문은 남원 일대에, 임나사현은 순천·광양·여수 일대에 각기 비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임나사현을 영산강유역에 비정한 바 있다. 임나사현과 관련하여 최근 고고학적 연구성과와 연결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다소 왜곡된 『일본서기』의 임나사현 기사(512년)를 재해석하면 ‘임나사현’은 가야(대가야)가 통제하다가 백제가 빼앗은 지역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위치하면서 대가야유적·유물에서 백제유적·유물로 전환되는 곳 중에 고지명으로 연결되는 곳이 임나사현의 위치이다. 임나사현 가운데 ‘모루’와 ‘사타’는 백제시대에 광양과 순천의 지명인 ‘마로’,‘사평’과 음이 유사하여 연결된다. 임나사현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은 대가야 문물이 다수 확인된 순천 운평리고분군으로, 5세기말∼6세기초에 해당한다. 순천지역에는 6세기 전엽 이후에 고고자료가 가야에서 백제로 전환되고 있어 뒷받침된다. 

 일본에 임나사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주로 지명 비정에만 의존한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나 역사적 맥락을 깊이 인식하여야 하고, 고고자료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나’를 문제삼는 측에서는 임나를 인정했으니 ‘임나일본부’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적이지 않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총독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조선’이라는 국명을 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삼국사기』가 있는데 왜 『일본서기』를 인용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한다. 가야를 연구함에 있어 『삼국사기』의 단점은 가야 멸망 기준(562년)으로 보면 너무 늦게 편찬(1145년)되어 가야 관련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편찬(720년)에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망명한 이주민이 가져간 백제 사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역사 연구는 향토애와 민족애 같은 뜨거운 감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이성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이는 전라도천년사 편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수십년간에 걸친 고고학적 결과물 및 사료(『일본서기』)비판을 거친 연구성과가 감정적인 접근으로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최근 반일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이미 극복된 ‘임나일본부’라는 역사적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 극우파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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