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주역사박물관장)

박승종(朴承宗)과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은 부자간에 전라감사를 지냈다. 대대로 문과자를 배출한 명문의 후예로 당색은 북인(소북)이다. 박승종은 아들 박자흥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 광해군이 폐위될 때까지 5년간 영의정에 있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박승종은 장남 박자흥과 함께 자결하였으며, 차남 박자응(朴自凝)에게 편지를 보내, ‘너는 죽지 말고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라.’고 유언하였다.

박승종 묘소(경기도 고양, 밀양박씨 숙민공파 종중)
박승종 묘소(경기도 고양, 밀양박씨 숙민공파 종중)

 

대대로 문과자를 배출한, 광해군대 세자빈의 본가

박승종 집안은 밀양박씨로 대대로 문과자를 배출한 명문이다. 태조의 원종공신 박침(朴沈)의 집안으로, 그 아들 박강생(朴剛生)으로부터 박자흥까지 11대에 걸쳐 2대를 제외하고 9대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강생은 박승종의 9대조로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건국 후 수원부사를 지냈으며, 딸이 세종의 후궁이 되어 의정부 찬성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유려해 문명을 떨쳤다.

박승종의 7대조 박중손(朴仲孫)은 세조대 정난공신에 책봉되었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6대조 박미(朴楣)는 본인과 네 아들 의영ㆍ광영ㆍ중영ㆍ소영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5대조 박광영(朴光榮)은 형조참판에 올랐다. 증조부 박충원(朴忠元)은 이조판서, 조부 박계현(朴啟賢)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박승종의 두 아들 박자흥과 박자응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광해군이 박자흥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면서 그 가문의 가세(家勢)를 묻자, 이항복이 박씨의 가세는 명벌(名閥)에 속합니다. 종사(宗祀)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맡기기에 정말로 잘 어울립니다.”라고 하였다.

 

박승종, 병조판서 재임 중 전라감사로 좌천

박승종(15621623)은 자가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1585(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25살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관인 예문관 봉교, 지제교, 병조정랑을 거쳐 강원감사, 홍문관 부제학,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병조판서(2)로 임용되었다가 영창대군을 지지한 유영경의 당여라고 해서 탄핵을 받고 1609(광해 1) 3월 전라감사(2품직)로 좌천되었다. 그 다음 달 4월에 전라도 임지에 부임하여 이듬해 4월에 1년 임기를 채우고 이임하였다. 이후 형조판서에 임용되었다.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장계를 올려, 금구현에 사는 노인 최희연이 75세임에도 선왕이 승하한 후 매월 삭망에 망곡을 하고 있으며, 무안현의 노비 비내(非乃)는 나이가 80세인데 선왕 승하 후 조석으로 곡을 하고 있으니 포상하자고 한 일이 있다.

읍백당 터
읍백당 터

 

소북의 거두로 광해군 말기 5년간 영의정 역임

박승종은 광해군 3년에 그의 아들 박자흥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권력이 날로 성해졌다. 광해군 10년 우의정에 올라 좌의정을 거쳐 광해군 11(1619)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며 밀양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광해군 말기 5년간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광해군대 세도가 삼창(三昌) 중 한 사람이다. 광창부원군 이이첨, 밀창부원군 박승종, 문창부원군 유희분의 부원군호에 모두 ()’자가 있어서 삼창이라고 하였다. 이이첨은 대북, 박승종과 유희분은 소북이다. 서로 인척으로 연결되어 있다. 박자흥이 이이첨의 사위이고, 박자흥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이며, 유희분은 광해군의 처남이다.

박승종은 인목대비 폐모론에 극력 반대하였다. 대외 관계에서도 광해군과 달리 새로 일어난 후금(청나라)을 배격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굳건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소북의 거두로, 사돈이자 대북의 핵심인 이이첨과 대립하였다. 인조반정 후 반정의 주축인 이귀와 김류 등도 박승종은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사(士類)를 보호한 공로가 없지 않다고 하면서 이이첨과 다르다고 하였다. 그는 온건파로 이귀, 김류 등과도 사이가 멀지 않았던 것 같다.

 

박자흥, 이이첨의 사위로 세자빈의 아버지

박자흥(15811623) 초명이 흥립(興立), 자는 인길(仁吉), 호는 서당(瑞堂)이다. 박승종의 아들이며 이이첨의 사위이다. 그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이다. 1610(광해 2) 나이 3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 문과에 연달아 급제하였다. 당시 고시관이 아버지와 장인이어서 물의가 일었다.

당시 시관은 좌의정 이항복, 이조판서 이정귀, 형조판서 박승종, 호군 조탁ㆍ허균ㆍ홍서봉ㆍ이이첨, 승지 이덕형(李德泂, 한음 이덕형과 다른 인물) 등이었다. 이 시험에 박자흥, 조탁의 동생 조길, 허균의 조카 허보와 조카사위 박홍도, 이이첨의 사돈 이창후가 합격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창후는 뒤에 전라감사를 지냈다.

박자흥은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 광해군 3년에 세자시강원 정7품 설서(說書)로 있다가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특지로 정6품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광해군 4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이후 의정부 사인(舍人, 4) 홍문관 전한(典翰, 3)을 역임하였다.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출시키는 일에 동참하여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전라감사를 지내고 경기감사 때 인조반정 발발

박승종은 이후 승정원 승지, 형조참의 등을 지내고 1616(광해 8) 11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5월에 형조참판이 되어 이임하였다. 전라감사 부임 초에 전() 전라감사 이덕형(李德泂), 전 고부군수 이승형이 호랑이를 잡은 일을 조사해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서 박자흥은, 부안 교생 최처중이 호랑이를 잡은 것을, 마침 부안현감이 공석이어서 부안현감을 겸하고 있던 겸관 고부군수 이승형에게 보고한 것인데, 이승형이 공을 가로챈 것이라고 하였다. 부안 변산은 계곡이 깊어 호랑이 같은 맹수의 소굴이었다.

그는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형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내고 광해군 14(1622) 12월에 경기감사에 임용되었다. 경기감사 재임 중인 이듬해 5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그는 장인 이이첨과 서로 반목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부자가 함께 자결

1623(광해 15)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있던 박승종은 아들 경기감사 박자흥을 오라고 하여 절간으로 들어가 같이 자결하였다. 당시 아버지 박승종은 62세이고, 아들 박자흥은 43세였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데 앞장섰던 이이첨과 유희분은 참형을 당했다. 박승종은 역모가 일어나기 전에 그 조짐을 경계하였다고 하고, 반정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공략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이 이미 반정세력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廣州)의 선산에 가서 배알하고 승방(僧房)에 들어가서 아들 자흥과 함께 술에 독약을 타서 마시고 죽었다. 항상 비상을 가지고 다녔으나 급한 상황에서 잃어버려 하인으로 하여금 목을 매게 하여 죽었다고도 하며, 비상을 먹었으나 죽지 않아 목을 매었다고도 한다.

실록에는 다음의 이야기도 덧붙어 있다. “(박승종은) 만년에 광해가 패망할 것을 알고 늘 주머니 속에 독약을 넣고 다니면서 변을 당했을 때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자 모두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재산을 모으고 저택을 치장하여 조정의 귀척들 중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차남 박자응에게 살아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 것을 유언

박승종은 죽음을 앞두고 영광군수인 아들 박자응에게 편지를 보내, 자결하지 말고 조상의 의 제사를 받들 것을 유언하였다. 다음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는 해당 기사이다.

우리 가문이 불행하게도 왕실과 혼인을 하여 부자가 머리를 맞대고 죽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너는 이위경(李偉卿)과 서로 논쟁을 한 일이 있고 처음부터 조정의 큰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조정이 필시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하지 말고 선조의 제사를 지키도록 하라.” 이위경은 인목대비를 시해하려 했던 인물이다.

1857(철종 8)에 충청도 진천의 유학 박준상이 소를 올려 박승종, 박자흥 부자의 복권이 230여 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때 우의정 조두순이 말하기를, 박승종은 광해군의 혼정에 책임이 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지켰다고 하였다. 박승종은 재주와 기량이 있는 사람으로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서울시 중구 필동에 박승종과 박자응의 집터를 알리는 읍백당(挹白堂) 빗돌이 있다. 읍백당은 박자응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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