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운 기로 연회도(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가운데 가장 높은데 앉아있는 우측 인물이 권대운, 우측 끝 가장 낮은데 앉아있는 사람이 권중경. 
권대운 기로 연회도(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가운데 가장 높은데 앉아있는 우측 인물이 권대운, 우측 끝 가장 낮은데 앉아있는 사람이 권중경. 
권협 영정(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권협 영정(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선무공신 3등 권협(이순신 선무공신교서 뒷부분, 보물, 문화재청)
선무공신 3등 권협(이순신 선무공신교서 뒷부분, 보물, 문화재청)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주역사박물관장)

권협은 임진왜란 때 서울 사수를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내 선무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손자 권대재는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위봉산성을 축조하였으며, 남인의 영수로 송시열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현손 권중경은 영의정 권대운의 손자로 영조 4년 조카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자결하였다. 권협은 선조대에, 권대재는 숙종대에, 권중경은 경종대에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권상과 다섯 아들 권수ㆍ권황ㆍ권희ㆍ권선ㆍ권협

권상(權常)은 안동권씨로 권협(權悏)의 아버지이다. 권상의 부인은 어모장군 나운걸(羅云傑)의 딸이다. 권상은 7살 때 아버지를 잃고 조광조의 제자 이충건(李忠楗)에게 수학하였다. 중종대에 21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소전 참봉, 운봉 현감, 용강 현령, 선공감 정() 등을 지냈으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문소전은 태조 어진을 모신 한양의 진전이다.

권상은 전주최씨 정랑 최말(崔沫)의 딸과 혼인하여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중 셋이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직에 올랐다. 첫째 아들이 권수(權燧)로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에 임용되어 전주 수성장으로서 왜군의 침공을 대비하다가 병사한 권수가 바로 이 사람이다. 그의 묘지명에, 왜적에 대비해 전주성의 해자를 깊이 파고 기린봉과 황화봉에 군사를 배치하였으며 그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은 권황(權愰)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순창 군수를 지냈다. 셋째가 권희(權憘)로 문과에 급제하고 도승지, 형조참판을 지냈다. 넷째 권선(權愃)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의흥위 부사직을 지냈다. 다섯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고 전라감사와 예조판서를 지낸 선무공신 권협이다. 권협의 손자가 영의정을 지낸 남인의 영수 권대운(權大運)이다. 또 권협의 손자 권대임은 선조의 딸 정선옹주에게 장가를 가서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다.

권상은 아들들을 잘 키워 집안을 일으킨 중흥조 같은 인물이다. 권협이 부탁하여 이항복이 지은 권상의 비명이 국조인물고에 실려 있다.

 

권협,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 사수 주장

권협(15531618)은 자()가 사성(思省)이고, 호는 석당(石塘)이다. 이관(李琯)에게 수학하였으며, 생원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유학(幼學)으로서 1577(선조 10)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의 지평ㆍ장령ㆍ집의, 홍문관의 수찬ㆍ교리ㆍ응교 등 삼사의 벼슬을 두루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의 파천 논의가 일었다. 4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해 오고, 428일에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탄금대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올라오자 선조는 한양사수론을 버리고 파천을 꺼내 들었다. 대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영의정 이산해가 울면서 나와 옛날에도 피란한 사례가 있다고 하여,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다음날 29일에 선조는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로 책봉하고 그다음 날 30일에 한양도성을 떠났다. 선조는 신료들의 세자 책봉 요청을 들어주고 파천을 단행한 것이다.

권협은 사헌부 장령으로서 죽어도 떠나지 않는다는 맹가(孟軻)의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대사헌 김찬과 함께 한양도성을 사수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후 선조가 파천에 대한 책임을 이산해에게 전가해 파직시키자, 이산해를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 가서 원병 요청

15977월에 왜군이 대규모로 재침할 것으로 예견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정하는데 권협이 적임자로 뽑혔다. 권협은 고급사(告急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간에 화약이 진행되고 전쟁의 소강상태가 지속되면서 명나라 군사들이 철수한 뒤였다.

권협의 사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명나라 군사가 다시 조선에 출병하였다. 권협은 이 공으로 전란이 끝나고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길창군에 봉해졌다. 이순신장군의 선무공신 교서에 보면 권협이 3등 공신으로 수록되어 있다. 권협을 선무원종공신이라 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권협은 또 그의 형 권희와 같이 선조 임금을 호위하여 호성원종공신에도 책봉되었다.

권협은 황해감사, 나주목사, 우부승지, 형조참의, 호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05(선조 38) 9월에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으로 부임하였다. 6개월정도 재임하다가 이듬해 3월에 이임하였다. 1607(선조 40)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골격이 장대하고 모습이 풍만하였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는 서울시 구로구 궁동에 있다. 이 묘역에 손자 권대임과 선조의 딸 정선옹주의 합장묘도 있다. 선조는 정선옹주를 시집 보내고, 권대임이 사는 지역 인근의 땅을 하사하였다. 궁동(宮洞)이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정선옹주는 21세에 요절하였다.

 

권대재, 전주 위봉산성을 축조하고, 남인의 영수로 송시열 사사를 주장

권대재(權大載, 16201689)는 권협의 손자로 아버지는 진사 권위중(權偉中)이다.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ㆍ돈간은(敦艮隱)이다.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1653(효종 4)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56(효종 9) 중시에도 급제하였다. 창평현감을 거쳐 전라도 도사로 있을 때 과거시험 시관으로 물의를 일으켜 파직되었다. 공주현감, 대구판관, 공산판관, 동래부사,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75(숙종 1) 5월 호조참의로 통정대부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에 이배(移拜)되어 7월에 도임하였으며 이듬해 2월에 파직되어 3월에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로 재임하면서 1675(숙종 1) 9월 위봉산성을 쌓을 것을 조정에 청해 축성하였다. 위봉산성은 유사시 전주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이안하기 위한 산성으로 성안에 행궁이 건립되었다.

이후 승지, 대사간, 대사헌, 경기감사,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즉위 후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로 본 송시열을 종묘에 고하고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남인이 허목의 청남과 허적의 탁남으로 분리되었는데, 송시열을 엄히 벌해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이 청남으로, 송시열을 관대히 용서해야 한다는 온건론자들이 탁남으로 자리하였다. 권대재는 허목을 따르는 청남의 중심 인물이다.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는 1680(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영변으로 유배되었고, 아들 권해도 창성에 유배되었다. 1689(숙종 15)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그해 2월에 홍문관 제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가 곧바로 호조판서로 탁용되어 김수항과 송시열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4월에 70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권대재는 경기도 안양 남쪽 10리에 병산(屛山)이란 곳에 살면서 연못가에 작은 서재를 짓고 '돈간재(敦艮齋)'라고 했다. 유학과 시문을 잘했고, 그림을 잘 그린 문인화의 대가였다.

 

권중경, 영의정 권대운의 손자로 조카 이인좌의 난 때 자결

권중경(權重經, 16581728)은 권협의 4대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권대운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권위(權瑋)이다. 자는 도일(道一), 호는 손재(巽齋)ㆍ정묵당(靜默堂)이다. 1689(숙종 15)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가독서를 하였고, 도당록에 뽑혔다.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 이조정랑, 사간원 사간, 승지,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서인이 재집권한 1694(숙종 20) 갑술환국 때 삭탈 당했으며, 1701(숙종 27) 옥구현 고군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후 풀려나 1722(경종 2) 승지가 되었다. 그해 5월 통정대부로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으로 부임하였으며, 7월에 유배 죄인 처결 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9월에 이임하였다. 이후 함경감사,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1728(영조 4) 척질(戚姪)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그의 사후 영조 9년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권중경은 이인좌의 종숙으로 역적의 초사에 그 이름이 나왔으니 역모에 동참한 것이 명확하다는 이유를 들어 삭직을 청했다. 영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저서로 정묵당집이 있다. 조부 권대운과 함께 천안 목천읍에 묘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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