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산리 등괘에서 본 구암리 구릉. 1970년대 초 호남야산개발의 현장
둔산리 등괘에서 본 구암리 구릉. 1970년대 초 호남야산개발의 현장

완주 구암리는 1970년대 초 호남 야산 개발의 중심지였다.

당시 유행했던 말이 아까운 야산을 놀리지 말고 목장개발을 위해 목초라도 심어라였을 정도로 야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었던 때이다.

1972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직접 현장 시찰까지 왔을 정도다. 당시 이 구역 야산 개발은 익산 왕궁면과 완주 봉동 구만리, 둔산리 일원을 하나의 사업지구로 묶어 시행했다.

당시 전 세계의 최대 관심사는 식량위기 극복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와 전북도 예외일 수 없었다.

매년 쌀과 밀, 옥수수 등 곡물 수 백만톤을 수입하는 처지에서 부족한 농지 해결책으로는 농지 확대기존 농지에서의 수확증대가 국정목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농지확보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은 야산 개발이었다.

이러한 완주지역 야산개발사업은 1972년 봉동에 이어서 1973년 이서면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구암리 원구암
구암리 원구암

 

완주 구암리는 고려시대 우주현관할이었다가 1409전주부에 편입됐다. 그 후 전주후기 전주부 우동면에 속했다가 1895년 전국을 으로 개편하면서 전주군 우동면으로 자리잡았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때 통정리, 신성리를 포함한 11개 리와 익산군 우북면 덕동 일부를 합해 구암리로 하고 봉동면에 편입됐다. 완주군이 전주군에서 분리된 1935년 완주군 봉동면 구암리가 됐으며 1973년 봉동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오늘날의 봉동읍 구암리로 불리게 된다.

 

구암리의 지형학적 위치를 살펴보면 천호산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한 지맥이 봉실산 쪽으로 가고, 가른 줄기가 봉동읍의 석탑천과 익산 왕궁면의 왕궁천 사이로 이어져 야산지대를 이루고 있다. 구암리는 이 능선의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완사면이 평지와 만나며 중앙으로 석탑천이 통과해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따라 낮은 구릉지는 밭농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석탑천 주변에는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서쪽의 능선을 따라서는 호남대로가 지나가던 옛길이 남아있으며 산록 완사면이 평야와 만나는 지점에는 나무들로 샘을 만들었다는데서 유래된 통샘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오랫동안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우물 주변 길가에 봉놋방이라 불리던 여관이 줄지어 있었다가 신작로를 내고 주택개량을 하면서 없어졌다.

통샘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통생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이 통샘은 춘향전에도 기록돼 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여산을 거쳐 삼례 비비정을 통과해 남원으로 간 경로에 이 곳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했고 마을 이름으로까지 삼았던 우물이 현재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통샘과 봉놋방이나 역참로 등 호남대로의 흔적을 찾아 옛길을 복원하면 역사문화자원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암리는 경지정리 전까진 물이 귀해 농사일이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뭄에 아주 취약했다. 마을 뒤쪽에 구암제라는 저수지가 있었지만 이 물이 구암리까지 오진 못했다. 따라서 구암리 대부분 지역은 석탑천 또는 논머리에 만든 논방죽에 의존해야 했다. 이마저도 가뭄땐 수량확보에 애를 먹었다.

구암리 농경지에 물사정이 해결된 것은 경지정리후 봉동양수장이 가동되면서부터다. 봉동양수장 대간선수로에서 물을 공급받게 설계된 것이다. 이를 위해 서두에 제수문을 설치하고 양수장까지 올 취수구와 수로를 만들었다. 이 수로를 통해 봉동양수장에 물이 들어오면 모터를 돌려 야산 정수리 높은 곳까지 펌핑한다. 거기서부터 둔산리를 거쳐 구암리까지 충분한 농업용수가 공급된 것이다.

당시 이장였던 박명산 이장은 수리조합 물이 원없이 넘어왔다고 했다.(봉동 100년사 참조)

거북바위
거북바위
거북바위 설명패널
거북바위 설명패널

구암마을의 지명은 마을 뒤편에 있는 거북바위에서 유래됐다.

거북바위와 관련해 전해오는 말로는 일제시기 일본인들이 거북바위 반을 잘라서 익산 건설공사 현장에 쓰고 나머지 절반도 부스려고 하자 갑자기 날씨가 돌변해 천둥, 번개가 치자 석공들이 깜짝 놀라 황급히 도망갔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바위는 원형의 절반이고 바위에 일렬로 나란히 난 구멍은 당시 깨부수려 시도했던 쐐기 구멍 흔적이라는 것.

 

거북바위 앞 현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거북바위의 크기는 장축 410cm, 단축 300cm, 높이 230cm이고, 거북형상 중 머리 부분은 북향(마을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거북바위에는 바위를 쪼개기 위한 쐐기 자국이 남아있는데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인들이 풍수적으로 마을을 보호하고 융성하게 만드는 거북바위를 파괴하기 위해 쐐기를 박았을 때 마른 하늘에 벼락과 천둥이 쳐서 겁을 먹고 도망갔다고 한다

고고학적 관점에서 거북바위의 쐐기 자국은 석재를 다듬기 위한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며 거북바위 상단에는 성혈이라 부르는 지석묘의 주요 흔적이 잔존하고 있어 청동기 시대 지석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지석묘가 시간이 흘러 마을 신앙의 대상이 되는 사례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이를 통해 지석묘로 축조된 거북바위가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현판에 따르면 거북바위에 대한 전설은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현재 남아있는 바위의 모양이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거북의 형상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을 보충 설명한 것. 둘째는 일렬로 돼있는 쐐기구멍에 대한 인과적 해설. 셋째는 당산신으로서의 신성성을 부여하는 장치로서의 일화이다.

/최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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