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초당동 고택(허성의 부 허엽의 집, 도문화재자료, 문화재청 )
강릉 초당동 고택(허성의 부 허엽의 집, 도문화재자료, 문화재청 )
허성 묵적 (양천허씨대종회)
허성 묵적 (양천허씨대종회)
허성 묘표 탁본(용인시박물관, e뮤지엄)
허성 묘표 탁본(용인시박물관, e뮤지엄)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주역사박물관장)

()은 크고 신조는 높았어라. 돌은 닳을 수 있지만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허성의 묘비명이다. 허성은 허씨 오문장의 한 사람으로 당대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서화에도 능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와 왜적의 침공을 예견하였으며, 1601년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이임하였다. 허성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부탁받은 고명대신이기도 하다.

 

허씨 5문장의 문을 연 아버지 허엽

양천 허씨 허엽(許曄)과 그의 네 명의 자녀 허성(許筬)ㆍ허봉(許篈)ㆍ허난설헌(許蘭雪軒)ㆍ허균(許筠)이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세상 사람들이 이들 5인을 허씨 오문장가(許氏五文章家)”라 칭한다. 강릉 초당마을 허균ㆍ허난설헌기념공원에 이들 5인의 시비가 있다. 강릉시에서 이들의 시를 모아 허씨 오문장가 한시 국역집2000년에 펴낸 바 있다.

허성의 아버지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이다. 그는 서경덕의 고제(高弟)로 학맥을 계승하였다. 문과 갑과에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하고 대사성, 동부승지, 삼척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당색은 동인이며 남명 조식과 가까웠다.

허엽의 첫 번째 부인은 청주한씨 한숙창의 딸로 그 소생이 큰아들 허성이다. 한씨부인이 일찍 죽어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허봉, 허난설헌, 허균은 그 김씨 소생이다.

허엽이 강릉김씨를 처로 맞이한 후 강릉 초당마을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호가 초당인데 이 마을 지명에서 따온 것인지, 아니면 허엽의 호에서 초당마을 지명이 유래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초당두부를 허엽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복동생 허봉ㆍ허난설헌ㆍ허균

허봉은 허성보다 세 살 아래이나 문과에는 11년 먼저 급제하였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되었으며, 동생 허난설헌의 시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83(선조 16) 동인의 중진으로 송응개, 박근과 함께 서인 율곡 이이를 탄핵하는 계미당론을 주도하다가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하는데, 유배에서 풀린 후 방랑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38살의 이른 나이에 졸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은 허성보다 20살 아래이다. 허성은 허균을 자식 같은 존재로 보살폈다. 허균은 유성룡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2)에 올랐다.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은 계축옥사 때 친교가 있던 서얼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느끼고 이이첨의 대북에 투탁하였다. 이후 광해군 10년 그의 심복 현응민이 남대문에 광해군을 몰아내자는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이이첨에게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 되었다.

허난설헌은 본명이 초희(楚姬)로 허봉의 동생이며 허균의 누나이다. 시대를 앞서갔던 여류시인으로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안동김씨 김성립과 혼인했으나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시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남매를 잃고 배 속의 아이도 유산되어 불우하게 살다가 27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자신의 시를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하였으나 허균이 유고를 모아 난설헌집을 간행하였다. 중국에서도 간행되어 호평을 받았다.

 

허성, 아우 허봉 보다 11년 늦게 문과 급제

허성(1548~1612)은 허엽의 장자로,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ㆍ산전(山前)이다. 전라도 해남 출신의 대학자 미암 유희춘에게 수학하였다. 1568(선조 1) 21살의 이른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는 늦어서, 생원시에 합격한 후 15년이 지난 158336살 때 별시에 급제하였다. 동생 허봉이 1572년에 춘당대시에 급제하였으니, 동생보다도 11년 늦게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허성은 문과 급제 후 예문관에 들어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을 지냈다. 동생인 허봉과 허균도 예문관 검열 등 전임(專任) 사관을 역임하였다. 그러기에 허균이 자랑스럽게 말하기를 3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았다고 하였다. 예문관 전임 사관은 당대의 촉망받는 젊은 인재들이 가는 자리이다.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침범 예견

1589(선조 22)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서장관이 되어 이듬해 3월에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과 함께 일본에 갔다가 1591년 정월에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일본의 동태에 대해 서인 황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침범할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며, 동인 김성일은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허성은 동인이면서도 김성일과 달리 왜적이 침범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유성룡은 동인으로 김성일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김성일과 유성룡은 동인의 남인계열이고, 허성은 동인의 북인계열이었다.

동인의 남ㆍ북인 분리는 1597(선조 20) 서인 정철이 선조의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를 거론했다가 쫓겨날 때 그 처벌의 강도를 놓고 야기되었다. 온건론을 펼친 퇴계 이황계열은 남인으로, 강경론을 펼친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계열은 북인으로 분리되었다.

 

1601년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으로 부임

허성은 일본에 다녀온 후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 등을 거쳐 이조 참의, 승정원 승지,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601(선조 34) 8월에 종2품 가선대부로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제수되어 9월에 부임하였다. 그의 나이 54세 때이다.

당시 감사가 군현 수령을 겸했는데, 이를 겸목제라고 한다. 1601년에 겸목제를 삼남지방에 임시로 시행하였다가 1607년경에 폐지하였다. 이후 1652년부터 전라도에서 겸목제를 10년간 시범 운영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1669(현종 10) 전국적으로 겸목제를 시행하였다.

허성이 전라감사로 부임한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이므로, 전후 복구에 주력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선조실록에 기록된 특별한 사안은 없다. 다만 임용된 그달에 전라도와 경상도 해변에 왜적이 연달아 나타나서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있었다.

전라감사로 6개월 정도 재임하고 이듬해 선조 352월에 서울로 돌아갔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판 등을 거쳐 예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606(선조 39)에 이조 판서에 올랐다.

 

영창대군을 부탁받은 선조의 고명대신

허성은 1608년 선조가 임종할 때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 7(顧命七臣)’의 한 사람이다. 선조는 1602년 그의 나이 51세 때에, 김제남의 딸인 19세의 인목왕후와 혼인하였고 그 사이에서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선조가 승하할 때 영창대군은 3살이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태어나면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정쟁이 야기되었다. 후궁 공빈 김씨 소생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당시 선조의 정비 소생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이런 정국하에서 영창대군의 안위를 염려해 측근들에게 고명(顧命)을 남긴 것이다. 고명은 왕이 임종하면서 남긴 말을 말한다. 선조가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어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대군은 죽임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광해군일기 졸기와 비명에 실린 평

1610(광해 2) 광해군이 생모 공빈 김씨를 추숭하려 하자 허성이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허성은 경기도 광주로 내려가 살다가 161265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다. 인조 때에 의정부 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문집으로 악록집이 있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에, “성질이 고집스럽고 꽉 막혔으며, 당론을 좋아하여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였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서인의 평인데, 동인 허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인 김세렴이 찬한 허성의 비명에는 ()은 크고 신조는 높았어라. 돌은 닳을 수 있지만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비문은 산문으로 된 서()와 운문으로 된 명()으로 구성되어 비명병서(碑銘幷序)’라고 하는데, 명은 짧은 글로 공덕을 찬양하는 글이다.

허성은 허봉ㆍ허균 등 이복동생들과 길을 달리했다. 이복 동생들이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현실에 부딪혀 불우했던 것에 반해 허성은 정치권력의 중심부에서 현실과 조화를 이루었다. 허성이 세상을 뜬 지 6년 후 아우 허균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허성의 아들들도 유배되었다.

허성의 집안은 그 선대에 대대로 벼슬은 하였으나 주로 지방관을 역임한 것으로 보이며 가세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 아버지 허엽 대에 중앙에서 고위직을 지내고 허씨 5문장이 세상에 이름을 내면서 당대에 명문으로 자리했으나 허균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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