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가사문학관 앞 도로 건너)
환벽당(가사문학관 앞 도로 건너)
송강정
송강정
환벽당(김성원의 서하당유고 수록)
환벽당(김성원의 서하당유고 수록)

 

정철은 가사문학의 거성으로 문학사적으로 그 위상이 매우 높다. 그런가 하면 정치적으로는 정여립 사건 때 많은 동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주역으로 평해진다. 그는 서울에서 창평(담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581년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589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올라 위관으로서 추국을 관장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에 올라 선조에게 후계자를 세울 것을 요청하다가 유배되었다. 

  

▶서울 명문가로 을사사화 때 몰락

정철(鄭澈, 1536∼1593)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며, 어머니는 사간원 대사간 죽산안씨 안팽수(安彭壽)로 4남 3녀 중 넷째 아들이다.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에서 출생하여, 16세 때 전라도 창평(현 담양)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였다.  

 본관지 연일은 지금의 경상도 포항이다. 연일정씨는 연일 지명이 영일(迎日)로 바뀌어 영일정씨라고도 하고, 또 옛 지명이 오천(烏川)이어서 오천정씨라고도 한다. 연일정씨, 영일정씨, 오천정씨는 모두 같은 가문이다. 정철은 감무공파(監務公派)이고, 고려말 수절신 정몽주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이다.    

정철 집안은 명망가로 당시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큰 누이가 인종의 후비 귀인이고, 둘째 누이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다. 계림군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손자이며 인종의 외척 윤임의 조카이다. 정철은 누이들로 인해 궁중에 출입하여 비슷한 연배의 경원대군(명종)과 친했다.

정철이 10살이던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정철 집안은 계림군이 역모에 연루되면서 풍비박산이 났다. 윤원형 일파가 윤임이 계림군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역모로 몰았으며, 계림군은 안변에 숨어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가 잡혀와 거열형을 당하였다. 정철의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 경상도 영일 등으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유배되었다가 장살되었다. 이 때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하였다. 

▶정철이 16살 때 전라도 창평으로 이주 

정철이 16살 때인 1551년(명종 6)에, 원자 탄생의 은사로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전라도 창평(현 담양)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창평에서 과거 급제할 때까지 10년을 생활하였다. 창평 고서면에는 정철의 백부가 남원부사를 지내면서 이장한 자신의 아버지, 즉 정철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었다. 

정철 집안이 창평으로 내려온 이유로 조부의 산소를 거론하지만, 시묘살이는 명분이고 실제적으로 큰 이유는 을사사화의 여파를 피해 낙향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에 있다가는 또 어떤 화를 당할지 모르므로 시묘살이를 명분으로 아예 저 멀리 시골로 낙향한 것 같다.   

정철 집안의 세거지인 창평 지실마을(芝室, 芝谷里)은 정철이 살았던 곳은 아니고, 정철의 아들 정홍명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한 곳이다. 이들을 세칭 지실정씨라고 한다. 창평지역의 대표적 양반으로 ‘정고오유(鄭高吳柳)’를 꼽는다. 정씨가 가장 앞서 있다. 정철의 후예들이 지실마을에 세거하면서 출중한 인물들을 배출해 창평을 대표하는 가문이 된 것이다.

지곡리 앞쪽 도로가에는 한국가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문학관 뒤편에 지실마을이 있다. 지실마을 안쪽으로 담양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철 집안의 계당(溪堂)이 자리하고 있다. 계당에는 호남 5매로도 꼽혔던 계당매(梅)가 있었다. 얼마 전에 이 매화를 다른 곳으로 이식하였다. 

담양 고서면(옛 창평)에는 정철이 거처했다는 송강정이 있다. 정철이 대사헌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여기에 초막을 짓고 4년간 살면서 「사미인곡」을 지었다는 곳이다. 당시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고 하였으며, 후손들이 1770년(영조 46)에 정자를 짓고 송강정이라고 하였다.  정자에 「송강정」과 함께 「죽록정」이라는 편액도 같이 걸려 있다. 정자 옆에는 사미인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김윤제의 문하생이 되어 월구실 유씨와 혼인

정철은 창평으로 이주한 후 창평의 명망가 광산김씨 김윤제(金允悌)의 문인이 되고, 월구실 유씨 유강항의 딸과 혼인하여 탄탄한 지역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철은 10여년을 창평에 살면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ㆍ송순ㆍ기대승ㆍ양응정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ㆍ성혼ㆍ송익필 등 성리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김윤제는 문과를 거쳐 홍문관 교리, 나주목사 등을 지내고 낙향하여 환벽당(環碧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정철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낯선 땅 창평에 터를 잡아가게 되는데, 여기에 환벽당 이야기가 전한다. 환벽당은 푸름으로 둘러쳐져 있다는 의미로, 가사문학관 앞 도로 건너 천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 아래에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가 있다.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잠을 자다가 정자 아래 용소에서 용이 노는 꿈을 꾸고, 하인을 시켜 내려가 보게 하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 소년을 불러 보니 정철이었다. 정철이 순천부사로 있는 백부를 만나러 가다가 용소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김윤제가 정철의 비범함을 보고 자신의 문하에 두었으며 외손녀의 사위로 삼았다. 

김윤제의 사위가 문화유씨 유강항(柳强項)이다. 유강항은 바로 중종반정으로 생이별을 한 중종비 신비의 복위 상소를 올렸던 무안현감 유옥(柳沃)의 아들이다. 중종 10년 유옥은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과 함께 순창 삼인대(三印臺)에서 관인을 소나무에 걸어 놓고 중종비 신비의 복위 상소를 올렸다. 목숨을 건 삼인대 신비 복위 상소는 사림의 표상으로 호남의 절의정신을 상징한다. 정철이 그 유옥의 손녀사위이다.

석헌 유옥의 후예들은 창평 유곡리(維谷里, 월구실)에 세거하여 세칭 월구실유씨라고 불린다. 현재 이 마을에 유씨 종택이 ‘유종헌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택은 와송당으로 불리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끝쯤에 있다. 주변에는 대나무가 꽉차 있으며 고택 입구의 매화가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석헌 유옥이 태어났고, 송강 정철이 신방을 차렸다고 한다. 정철의 처향 월구실에는 또 정철을 배향한 송강서원이 있었다. 지금은 훼철되고 없지만, 국가에서 공인한 사액서원이었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는, ‘해곡리 1구 얼그실마을’이라고 새겨져 있다. 유곡리를 월구실이 아니고 얼그실로 발음하고 쓰는 모양이다. 마을 앞으로는 너른 전답이 펼쳐져 있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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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전라도관찰사 역임

정철은 26살이던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에 1등 5위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등을 지내고 함경도 암행어사를 거쳐 율곡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이후 홍문관 수찬과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를 지내고 선조 8년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1580년(선조 13)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별곡」을 지었다.

1581년(선조 14) 12월 특지로 전라도관찰사에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9월 도승지에 임용되어 10월에 이임하였다. 그가 부임하기 전 해의 흉년으로 굶주린 유민이 가득하였다. 재난이 계속되면서 전라도에서 여러 이변이 속출하기도 하였다. 전주에서는 사노(私奴) 손동 집에서 발이 4개인 병아리가 나왔으며, 광주에서는 삼촌 숙모를 타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철은 전라감사로서, 권대덕이 남원부사로 임용되었을 때 본가와의 거리가 60리이고 그의 두 누이와 한 아들이 남원부 관내 사람과 혼인해 사정에 관계되는 일이 많을 것이라고 하여 교체를 요청한 일도 있었다. 권대덕은 남원부사로 부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 호에 2편 연재〉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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