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통문
사발통문
일본 영사관 신문 받고 조선 법무아문 이송장면
일본 영사관 신문 받고 조선 법무아문 이송장면

 

‘구릉의 땅’으로 불리운 고부는 평야지대가 많고 예로부터 수리시설이 발달돼 있었으며 지역 생산 물품도 풍족했다. 삼한시대에 처음 축조한 대규모 수리시설인 ‘눌제’가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폐제됐고 이를 대체한 수리시설로 게보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평야 한가운데를 흐르는 동진강에는 광산보가 있었다. 

이들 수리시설들은 논농사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담했다. 하지만 이러한 수리시설의 수축과 관리에 따른 문제는 수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가혹한 시련을 고부 주민들에게 안겨주게 된다. (최기성 ‘19세기 후반 고부의 폐정실태’ 발췌)

사실 고부는 비옥한 들판-평야를 보유했지만 농민들의 삶은 풍족하지 못했다. 

그 첫 번째 원인은 ‘궁방전’ 확대였다. 궁방전은 왕족들의 궁방에 소요되는 경비와 죽은 뒤의 제사 비용을 위해 지급하던 토지를 말한다.

전라도 전주와 고부 지역에 유난히 궁방전이 많았으니 이는 그만큼 농민들의 경작지가 적었다는 것이다. 이러하다보니 백성들은 궁방전을 소작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관리들에 의해 수탈당하는 수치가 증가하게 됐다. 여기에 관리 같은 지배계층과 하물며 외국 상인들까지도 이윤추구 대열에 합류하며 소작농민의 몰락은 물론 기존 부농들까지도 생산기반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특히 조선후기 고종 시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해 나라는 병폐에 빠져들고 백성들의 삶은 최악으로 내몰렸다. 흥선대원군의 몰락후 권력을 잡은 일부 민씨 일가들은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 많은 재정을 낭비했고 국고가 고갈되자 매관매직을 통해 재원을 조달했다. 

매관으로 관직을 산 지방관들은 언제 해임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짧은 임기동안 매관비용과 승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수탈행위를 더욱 일삼았다. 고종 14년인 1877년 전라우도 암행어사 어윤중의 보고에 따르면 ”고부군수 이수은은 ‘관진미 145석’ ‘취승미 270석 및 600냥’을 비록해 공금 7698냥 포함 총 3만2000냥을 착취했다.“고 전해진다.

더불어 조선후기의 조세제도는 농민들의 고충을 더욱 가중시켰다. 법규상 규정 세액 외에도 부가세, 잡세 등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이 늘어 규정보다 몇 배나 되는 세금을 부담했으며 이 세금은 국가나 지방관청의 재정으로 흡수되기 보다는 중강관리층의 착취로 이어졌다. 개항 후에는 일본과 청나라 등을 위시한 외국인 자본주 ㅜ세력의 침투가 이뤄져 국내 경제적 이권 탈취행위는 더 확대됐다. 

특히 고부 지역은 연해 곡창지대로 미곡반출이 심했으며 ‘조병갑’ ‘조필영’등의 수탈-착취 가세로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갔다. 

고부지역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고부군수를 역임한 관리가 300명 까까지 됐을 장도로 다른 어느 고을보다 가렴주구가 심했다. 이 중 1/3가량이 부정부패로 삭탈관직 됐다.

1936년 간행된 ‘정읍군지’에 실린 ‘전봉준실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악행을 일삼으며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하기에 눈이 붉어있다. 그러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부의를 주창하고 2000냥을 분배해 고부향교의 장의 김성천과 전 장의 전승록(전봉준의 아버지)에게 부의를 의뢰 했더니 성천이 “조병갑은 선치가 없었으며 기생 모친의 죽음에 무슨 부의냐”는 대언을 토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으로 퇴관했으나 재물착취에 만족감을 느낀 나머지 독기를 품고 다시 부임하게 됐다. 그러나 이미 김성천은 죽었고 전승록을 불러다가 곤장을 난타해 귀가 후 두 달이 못돼 죽었으니 아들 봉준의 철천의 한이야 어찌 다 말하랴“

이후 조병갑은 또 다른 착취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고부군내 배들평야는 고부, 정읍, 태인 3군의 계곡물이 가운데를 관통해 흘로 그 땅에서 살아온 농민이 그 상류에 보를 만들고 물을 대어 풍요롭게 농사를 지어왔다. 이 보가 그 유명한 ‘만석보‘이다.

조병갑은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고을 백성들의 재물을 뜯어가고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전례에 없는 ’보세‘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농민 1호당 다섯말에서 열말의 곡물을 억지도 거두다가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종전의 4~5매의 만석보 개축을 하게된다.

이는 곧 홍수로 인해 농사 피해 는 커졌지만 조병갑은 ’수세‘라 칭하며 많은 양의 곡물을 착취해 예동, 두전, 백산 3곳에 수 천석씩 쌓아두었으니 민심은 들끓었다. 

처음 고부 농민들은 소장을 통해 조병갑의 탐욕과 수탈행위를 저지하려 했다. 그리하여 농민 40여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조세감면을 요청했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들을 난민으로 몰아 몇 명을 구금하는 악행을 저지른다.

난민으로 몰린 농민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목적 달성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농민의 힘으로 포악한 관리들을 벌주기로 결심한다. 주도 인물은 전봉준과 송두호였다.

송두호는 동학 도인으로 지역내에서는 꽤 이름이 일려진 자였다. 그러므로 농민들의 호응을 얻기가 쉬웠을 것이다. 

조병갑의 곤장세례로 부친을 잃은 전봉준을 대표로 농민대표들은 1893년 계사년 11월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모여 숙의한 결과 봉기 계획을 정하고 사발통문을 만들ㅇ너 각 마을의 집강들에게 보내게 된다.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은 대부분 동학교도들인데 이들은 이미 서울로 올라가 집단적인 상소운동과 척왜양 격문 게시 투쟁을 함께 펼친 적이 있다. 또한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탄압을 중지해달라는 교도들의 운동였던 ’교조 신원운동‘도 함께한 이들이었다. 즉,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일대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은 신원운동 단계부터 이미 고을단위의 소규모 봉기가 아닌 전국적 차원의 농민봉기를 꾸준히 추진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고장의 역사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근대역사의 큰 변혁을 가져온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제폭구민-보국안민‘으로 우리의 인권과 민권을 주장했고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며 반봉건과 반외세를 내세웠다. 그 발단이 바로 고부농민봉기였다.

1894년 1월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재임되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부농민들은 분개했다. 그들은 8일 말목장날을 맞아 큰 굿판을 벌였는데 이날 전봉준은 군중들에게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설명하며 ’제폭구민‘을 강조하니 원에 맺힌 군중들이 큰 호응으로 화답했다.  

1월9일 밤 전봉준은 군중을 이끌고 고부읍내로 향했다. 군중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였으나 사전에 이를 알아챈 조병갑이 미리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 그의 행적을 수소문 했으나 결국 찾지를 못했다. 군중들은 옥사를 열고 억울한 죄수를 풀어준 뒤, 창고를 헐어 양곡을 나눠주고 무기고를 부숴 무장을 하게 된다. 

당시 전라감사 김문현은 고부 사태를 조정에ㅡ 알리지ㅡ 않고 본인이 집압하려 했지만 실패하게 된다. 그후 한 달이 지나서야 고부 봉기를 보고받은 조정에서는 조병밥에게 파직을 명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리게된다. 2월 15일 체포된 조병갑은 남해안 고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중적인 대응을 보이게 된다.

첫 번째 대응은 용현현감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해 민심 수습에 나선 것인데 2월 15일 부임한 박원명은 농민군의 기포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농민군 해산을 유도했다.이에따라 농민군과 고부관아는 협렵관계가 형성됐다. 

두 번째 대응은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해 역졸 800명과 함께 동학교도들을 민란의 주모자로 몰아서 닥치는대로 체포-투옥하고 가옥을 불지르기까지 했다. 심지어 부녀자 간음까지 서슴치 않아 농민들의 원한까지 샀다. 

전봉준은 자신을 따르는 수십 명과 함께 손화중이 대접주로 있는 무장으로 피신해 후일을 도모한다. 

고부봉기는 1892년에서 1893년 동학교단의 주도하에 고부지역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사발통물을 통한 거사 계획과 관련성을 따져볼 때 조직적-연속성을 가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전봉준을 비롯한 강력한 지도부가 중심이 되어 ’농민의 민군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 전의 농민봉기와 차이점을 보인 것이다.

비록 고부농민봉기가 전국적인 확산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이후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고부농민봉기는 고부만이 아니라 전체 농민항쟁의 신호탄이자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최병호기자.hoya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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