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좋은 어버이가 되는 일은 천운 혹은 행운에 맡길 수 없다. 좋은 어버이가 되는 일은 어버이 자신들이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어버이가 되지 못했을 때는 일종의 책임이 따른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고, 더 나아가 자녀들과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게 되고, 때로는 자녀들과의 만남을 거부당하며, 아주 드물게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적인 비난이나 법적인 처벌도 받는다. 그러나 좋은 어린이가 되는 일은 천운 혹은 행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은 좋지 않은 어린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좋지 않은 어린이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판단을 할 이성이 채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는 것이리라.
 5월에는 이 사회가 합의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이 둘 사이의 매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인들을 집단으로 인식하고, 세대로 표현하면서 낀 세대의 애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에 합당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어린이와 어버이에게 무엇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하기 위한 기획을 한다. 물론 이러한 기획 자체를 성가셔하는 성인 혹은 매개자들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들은 좋은 어린이로서의 시절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거나 혹은 그러한 환경적인 요인에 사로잡히거나 구속되어 좋은 어버이가 될 선택을 하지 못했거나 애써 선택하지 않아서, 이미 좋은 어버이가 되어 있지 못한 성인들일 가능성이 높다.  
 낀 세대라고 하는 매개자들은 사실 상 아주 억울하게 힘든 세대라고만 볼 수 없다. 오히려 뭔가 억울하다는 피해의식만이 과대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발상을 해본다. 왜냐하면 매개자인 성인들은 이미 어린이와 어버이라는 양 쪽의 삶을 다 경험해 본 존재들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경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단선화해서 직선상에 어린이와 어버이가 존재한다고 할 때 낀 세대는 그 중간에 위치해서 양팔 사이의 몸통과 같은 존재로서 양팔이 잡아당길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에너지를 뺏기는 것 같은 그림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끼어 있는 단선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보이는 어버이 혹은 보이지 않는 어버이, 좋은 어버이 혹은 좋지 않은 어버이의 양육 하에 어린이로서의 시대를 살아 왔고, 성장했고, 드디어 성인이 되어서 결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선배 어버이와 유사한 어버이가 되어있는 것이다. 어버이가 되었다면 좋은 어버이가 되기 위한 선택을 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좋은 어버이에게 양육되었다면 그 좋은 방법론을 좀 더 확장하고, 좋지 않은 어버이에게 양육되었다면 그들의 좋지 않은 방법론을 차단하고 단절하기 위하여 그 반대편에 있을 것으로 상상되는 좋은 어버이의 좋은 습관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하루하루 축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좋지 않았던 어버이를 반추하면서 원망하느라고 자신의 어린이들에게 좋은 어버이가 되는 일에 소홀하게 되면 그 결과는 결국 자신과 자신의 어린이에게로 돌아온다. 자신도 좋지 않은 어버이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어린이들도 좋지 않은 어버이의 양육 하에 좋지 않은 어린이로 자라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들과 어버이의 매개자인 성인들이 모두 함께 좋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주어진 축복만을 세어보며 같이 즐겨 보며 노는 날이고, 어버이날은 어버이들과 어린이의 매개자인 성인들이 좋은 어버이로서의 정체를 재 다짐하며 마음 깊이 감사하는 날이다. 어떤 기념일이건 의무와 고통과 책임을 과장하면, 권리와 기쁨과 누리는 일이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5월에는 고통으로 포장된 삶에서 숨은 의미를 찾는 좋은 어버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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