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사로잡은 의연한 기개, 부당한 재판을 전 세계에 알리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하>다롄, 세기적 재판의 승자는 안중근이었다 권순재 기자l승인2019.04.17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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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
하얼빈에서 중국 고속철에 올라 4시간 30분 달려 도착한 곳은 다롄(大連)이다. 항공편으로는 하얼빈 타이푼 공항에서 다롄 진저우 공항까지 1시간 30분이면 닿는다.
다롄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랴오둥(遼東)반도 남단부에 위치한 해변 도시다. 중국 변방 어촌이었던 다롄은 제국주의 시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러일전쟁 이후 일본 등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침략 거점으로 전락했다.
다롄에서도 1950년 합병된 뤼순(旅順)은 독립운동가 안중근, 신채호, 박희광 등이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던 일제시대 형무소 뤼순감옥(旅順监狱)과 뤼순관동법원(旅順關東法院)이 남아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체포돼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압송됐다.
당시 법체계에 따라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으나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 일본 법원으로 송치됐다. 뤼순감옥에 옮겨진 동안에는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됐다.
관동법원은 안중근에 대해 일본 관선 변호사에게만 변호를 허락했다. 조선반도와 영국, 러시아 등 각국의 변호사들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변호를 신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방청객도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1909년 11월 6일 안중근은 서면으로 ‘한국인 안응칠 소회’와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를 제출했다.
당시 안 의사가 밝힌 이토의 죄는 ▲명성황후 시해 ▲고종황제 폐위 ▲을사늑약과 한일신협약 강압적 체결 ▲독립 요구 대한인들을 죽인 죄 ▲정권 찬탈·통감정치제로 바꾼 죄 ▲철도·광산·녹림·산지를 강제로 뺏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 강제 사용▲군대 강제 해산 ▲민족교육 방해 ▲외국유학 금지·식민지를 만든 죄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불태운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원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아무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일본천왕을 속인 죄 ▲대륙을 침략해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왕의 아버지를 죽인 죄 등이다.
심문을 맡은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은 “진술에 의하면 그대는 한국을 위해 실로 충군애국의 사인 바 그대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고 제1차 신문조서에 남겼다.
6차례 열린 공판에는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과 함께 나란히 앉았다. 공판 과정에서 당당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은 안중근은 부당한 재판을 오히려 일제의 침탈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삼았다.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던 순간에도 “일본에 사형보다 더한 극형은 없느냐”며 죽음 앞에서조차 한 점 흐트러짐 없었다.
안중근의 재판을 지켜본 영국 ‘그래픽’(The Graphic)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등박문은 한 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공판기록에는 고등법원 원장인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가 안중근에게 항소를 안내한 것으로 남았지만, 안중근은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뜻에 따라 항소를 하지 않았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민족주의 사학자는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고 기술했다.
109년이란 시간이 흐른 뤼순감옥과 뤼순관동법원은 당시 일본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감옥 규칙을 중대하게 위반한 자와 반항, 투쟁을 하는 자를 수감하는 암방은 모두 4개실로 캄캄하고 축축해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간수가 감옥 안을 감시할 수 있는 안은 크고 밖은 작은 원형 감시창만이 뚫려 있다.
또 사람 가죽을 벗기는 기구, 인체를 고정시켜 발가락에 금속으로 만든 바늘을 박는 기구, 손과 발을 묶어 도르래로 쇠사슬에 감아 인체를 화로벽에 산 채로 태워 죽이는 기구 등 고문을 위한 기구가 전시됐다. 또 안중근이 순국한 형장에는 그의 흉상과 사진이 세워져 헌화 등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뤼순관동법원 안내 팻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 또한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백여 년 전의 국난과 항쟁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시기의 역사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그 시기의 침략과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각국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더 많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갑시다. 그리고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기원합시다.<끝>/다롄=권순재기자·aonglhus@/취재지원=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진흥재단


권순재 기자  aongl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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