壁城

四圍平野突起壓
登占至難絶要塞
違天不和棄壁城
羅唐犧牲泥土涯

槐木綠陰奄藏史
足衝瓦片望說哀
未覺醒輩恐躇掘
今復百濟弘益愛

 

壁城(벽성)     김제 벽성

四圍平野突起壓(사위평야돌기압)
천지사방으로 드넓은 김제만경평야
백제 당시에는
성산으로 우뚝 솟아 적들을 누르리라.
登占至難絶要塞(등점지난절요새)
물길도 거세어 벽성에 오르고 차지하기
매우 어렵고 어려워
절체절명의 절대적 요새이었거늘.
違天不和棄壁城(위천불화기벽성)
백제 부흥군 적 앞에서 천리를 어기고
서로 불화하며
천하 요새 벽성을 버리니 멸망이 눈앞.
羅唐犧牲泥土涯(라당희생니토애)
신라 당나라 연합군 1,353년 전 오늘
백강 갯벌에 갇힌
백제 부흥군을 바닷가에 수장시키니 슬프구나.

槐木綠陰奄藏史(괴목녹음엄장사)
저 멀리 지평선에 서면 벽성 옛터는
느티나무 그늘에
백제의 슬픈 역사를 가리고 감추는가 보다.
足衝瓦片望說哀(족충와편망설애)
성 터에 올라서면 발에 부딪치는 건
알 수 없는 기와조각들
아리고 아린 비애를 설명하기를 바라는가?
未覺醒輩恐躇掘(미각성배공저굴)
백제 벽성 피성의 역사가 두 눈에 선명한데
각성하지 못한 사대주의
잔재들 온전한 발굴을 두려워하며 주저하네.
今復百濟弘益愛(금부백제홍익애)
벽성 볏골을 지키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
백제정신을 되살려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사랑을 널리 펼쳐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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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3년 전 그러니까 663년 음력 9월 7일 오늘 백제는 이 강토에서만큼은 온전히 역사를 다하게 되었다. 백제 왕자 풍을 중심으로 하는 부흥군 세력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궤멸되면서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8월 28일부터 시작한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 선단 400여 척은 백강 하구에 도착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결전을 치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바닷물의 조수 간만의 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뻘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적들의 대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궤멸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이로써 백제 역사가 이 땅에서 끝나게 된다. 일본서기는 백제의 마지막 순간의 비통함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류성도 항복했으니 어찌할 길이 없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 끝장이 났다. 다시는 조상들의 산소에 성묘할 수도 없게 되었구나!”
  마지막 항전에 앞서서 부안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전쟁을 벌이던 백제는 662년 12월 벽성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이 벽성, 지금의 성산이 백제의 임시수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거센 공격 등으로 663년 2월 초에 다시 주류성으로 옮기게 된다. 그해 5월 왕자 풍은 복신을 죽이니 내부분열이 격화되고 만다. 적 앞에서 분열한 백제는 부흥의 힘을 더 이상 증대하지 못하고 꺾이게 된 것이다. 김용운 교수는 이에 대해 <풍수화, 맥스미디어>라는 책에서 뼈아픈 진단을 내린다. 즉 신라가 당나라라는 중국 세력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이후 우리나라에 사대주의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됐다고 비판한다. 참으로 명료한 해석이다. 이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또 벽성을 백제시대 모습으로 온전하게 복원하는 게 시급하다. 그리고 바로 앞의 향교와 동헌, 내아, 전통시장까지 연결해서 백제문화, 선비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게 김제시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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