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천재로 불리는 신라 대문장가이자 학자였다. 열두 살 유학을 떠나 당나라 진사시에 합격, 황소의 난 당시 ‘토황소격문’을 지어 중국사회를 깜짝 놀라게 하는 등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바로 최치원이다.

흔히 알고 있는 정보라며 식상해 할 수 있지만 미처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여기 최치원의 영정에 숨어있는 진실과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사연이 펼쳐진다.

손상국이 ‘최치원을 추억하다-고현내 사람들과 최치원 영정이야기(신아출판사)’를 펴냈다. JTV 방송사 PD였던 글쓴이가 ‘전북의 발견’을 연출하며 소재거리를 찾던 중 1960년대 최치원 영정이 우연히 발견됐다 갑자기 사라졌다는 얘길 접하고 본격적으로 취재한 게 계기다.

2009년부터 자료 수집과 역사 고증, 인터뷰를 거쳐 방송으로 만들긴 했지만 못다한 얘기를 담고 싶어 2015년 12월 31일 정년퇴임과 함께 집필을 시작했다. 크게는 쌍계사본 원본 영정의 행방을 찾고 싶었고, 이어서는 최치원의 위패를 천 년이나 유지한 고현내(지금의 칠보)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파서다.

영정의 경우 지금껏 잘 알지 못한 내용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글쓴이에 따르면 무성서원에서는 사당 최초로 1784년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했다. 지리산 쌍계사에 있었으나 하동 유림들이 유학 종장을 불가에서 모실 수 없다 해 강제로 빼앗아 최씨 후손가에 맡겼다 오게 됐다.

그런데 이 영정이 급작스레 사라져 버렸고 1831년 모사한 영정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이들을 찾기 위한 여러 눈물겨운 노력이 이뤄진 결과 사라진 두 축 중 1831년본이 정읍시립박물관으로 내려왔다.

반면 쌍계사본 원본 영정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책에는 무성서원에서 쌍계사본이 사라지게 된 과정과 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상세히 적혀있다. 천년을 한결같이 최치원을 그리워하는 무성서원이 위치한 고현내 사람들에 대한 조명도 잊지 않는다.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오랜 노력이 있었기에 조그마한 시골마을이 조선시대 선비문화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다는 것. 유림들에게 두 차례나 영정을 뺏기고도 계속해서 최치원의 영정을 그려 봉안해 온,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찰 쌍계사에 대한 이야기와 해인사본 최치원 영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실렸다.

전문적인 내용이 더러 있지만 콘티를 작성하듯 연속성을 가지면서 쉽고 간결한 문장과 풍부하게 삽입한 사진 및 그림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최치원의 백성을 향한 마음과 그를 그리워했던 백성들, 그와 인연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했으면 한다”면서 “무엇이 바른 삶이고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지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띔해 주는 조그마한 충고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이수화기자‧waterflower20@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