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두고 산으로 갈까?’
 질서와 규범 속에 발달한 사회가 흔히 자각하는 루울이다. 굳이 콜럼부스의 달걀을 들먹이지 않아도 산을 깎아 길을 만들려는 노력은 쉽지 않은 프런티어

의 세계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시된 ‘길’은 인류사 많은 기성가치에 불변의 세(勢)를 공고히 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것이 법이 되었건, 경전이 되었건, 풍습이 되었건 간에 이미 익숙해진 길은 안위와 평온을 약속하는 보장이었고, 이를 어기고 산을 오르는 발상은 무모

함과 발칙함의 표본이 되었다. 질서라는 것은 그렇게 무력한 다수의 생각을 관성으로 길들이기에 좋은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배우들을 훈련시키다 보면 소위 말하는 ‘쪼’(그릇된 습관 : 調)를 발견한다. 신체나 안면의 반복 이상 징후를 보이는 일종의 틱(tic)증후군처럼

억양(intonation)이나 제스처(gesture)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에 잘 발달된 감성에 의한 감정이입을 반복해서 응용하게 되면 감쪽같이 관중을 속이

는 명연기가 되곤 하였다.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거짓말도 오래하면 늘게 되고 자연히 진짜처럼 남을 속이는 기술로 발전하는 이치와 다름 아니다. 텔레비전의 사극(史劇)에 흔히 노출되는 오역(誤役,

miss casting)들이 국적불명의 이상한 억양으로 시청자를 현혹하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나치는 친절을 베풀고 있다. 즉, 그들이 전혀 보편적 감성과는

다른 억양을 구사해도, 우리는 친절하게 ‘관념의 해석’과 ‘관용적 상황’을 순간 대입하여 해석하며 잘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해석

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지나가는 착각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조직이나 사회에서 조차 잘 발달된 어휘와 형용의 관용어구들은 상대와 주변을 장악하는 도구가 되었다. 잘 숙달된 미사여구와 앞뒤 사귀를

잘 맞춘 언어적 축복은 출세가도를 달리는 자에게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으니, 이를 간파하지 못한 ‘귀 얇은 결정권자’들은 좋은 먹잇감으로서 그 세

치 혀 안에 늘 속박되었다. 이미 상대 기호의 MSG(Make show, Sycophancy, Gaga)를 알아버린 언어유희가 가장 즐겨 찾는 대상이라 할 수 있겠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상은 절대자의 입맛에 의해 돌아가고, 익히 익숙한 형태의 순환 고리에 종속되어지기를 강요하지 않던가. 성리학으로 점철된 조선왕조에서 공자와 주자

의 가르침에 어긋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비판받았다. 옳고 그름을 대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고 오로지 그 ‘말씀’에 의한 따름과 비켜감에 대한

분류만 존재한 것이리라. 그것이 공익이라 했다.
 조직에는 항상 ‘비우는 곳’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주자(走者)의 요강(溺罁, chamber pot)’이라 칭한다. 돈키호테에게 산초가 필요하고

이몽룡에게는 방자가 배설구였다. 어딘가는 뿜어내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 이문열의 엄석대에게는 한병태가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리더에겐 자신의 ‘절대가치’를 증명하는 수순에 항상 ‘절대절차’를 지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계륵(鷄肋)도 필요에 의해 존재의 당위를 부여 받는 시

대다.
 박근혜정부의 ‘창조’가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후 가장 주목받는 ‘탄생’의 징후로 부각되었다. 부셔서라도 세우라는 달걀은 약간씩 변형된 기성(旣成)

의 기울기를 가지고 이 사회의 여러 꼭지점에 마구 세워지고 있다. 융복합(fusion, convergence), 인터랙티브(interactive), 혁신과 재창조 등의 구호가

난무하며 ‘창조’의 화두를 접두어로 많은 신화가 재생산되었다. 건국 이후 가장 융성한 ‘창조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것이 ‘길’이 되었다. 로마로 가는 길은 모두 창조라는 번호판을 달아야만 달릴 수 있는 ‘재건(再建)의 포도(鋪道)’가 되었다. 가끔씩 존재의

증빙이 되어야 할 산초나 방자를 만들어 내면서 과오의 늪을 헤쳐 나가자는 구호가 난무하는 전제(專制)의 기반을 다지자는 것에 다름 아니던가? 그렇게

만들어진 정권의 희생양들은 영문 모르게 죽어간 심해(深海)의 원혼이나, 병문안 갔다가 숨 좀 쉬었다고 느닷없는 병으로 죽어 간 넋들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한 채, 정부는 연마해 온 숙달된 억양이나 제스처로서 오늘도 우리의 의식을 속이는 삐에로처럼 길을 두고 산으로 가자고 극성을 떤다. 참으로 날

씨는 무지하게 덥고 매미는 그악스레 울어 대는 여름날이다.
 /박병도 전주대교수, 입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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